아빠의 인생
신축하여 이사를 한 집은 새집이라 좋은 것도 있지만 주위환경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앞에는 여인숙과 술집이 위치해 있고 뒤편에는 성당이 있었고 바로 옆 공터였던 곳도 집을 짓더니 술집이 들어서 버렸다.
밤이 되면 접대부가 있는 술집이 두 곳이나 있어 툭하면 취객 손님과의 싸움 판이 벌어지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아마도 술값으로 인한 싸움이겠지만 주인여자와 여종업원들까지 가세해 무서울 정도로 손님을 대하는 걸 보니, 역시 유흥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욕도 잘하는 무서운 사람들이고 거친 사람들이란 각인을 오늘날까지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학 예비고사(지금의 수능시험)를 치른 후에는 같은 학급 친구들 몇 명이서 자취 생활을 하는 친구집으로 놀러 갔다.
그 자취생 친구는 고등학생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소주를 들고 와서 마시자는 것이다.
아마 부모님의 간섭에는 멀어져 있는 환경이라 술도 마셨던 모양이다.
안주로는 방 안에서 전기 곤로로 굽는 쥐치포와 새우깡 스낵 봉지를 뜯는 것이다.
생전 첨 마셔보는 소주의 쓴맛 (당시의 소주는 알코올 순도가 지금보단 훨씬 강함)과 알코올의 향은 역겨웠지만 취치포 안주의 달달한 맛에 희석이 되어 나름 마실 만했다.
권하는 데로 초보 술꾼이 연거푸 몇 잔을 마셨더니 급기야 천장이 돌고 방바닥은 기울고, 참다못해 토하러 가는 길은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한없이 멀기만 했고,
걸어가는 마당은 지진을 만난 것이 울렁거렸다.
먹고 마신 양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올리고 올려내도 끝없이 올려낸 기억이 난다.
그래서 술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는가 보다.
하지만 술은 나의 절친한 친구가 되어있다.
모든 일상이 순조롭게 잘 돌아가고 있으니 조물주는 인간에게 시련의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아버지가 류마티스 관절염이란 병을 얻어 바깥세상과는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고 매일 찾아드는 통증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 병은 불치병이고 관절의 마디마다 붓고 통증을 유발하는 병이란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건강악화로 가정 형편은 조금씩 기울어져만 갔고 형님은 취업전선으로, 큰 누나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의 길로, 작은 누나는 담임선생의 약학대 진학 권유도 형편상 등록금 부담 안 되어 뿌리치고 상대적으로 학비가 저렴한 간호학교로 진로를 택했다.
특히 작은 누나는 간호사 직업이 아버지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통증을 이기지 못하면 집에서도 진통제 주사를 맞곤 하는데, 작은누나는 없어서 안 될 존재였다.
어쩌다 작은누나가 없을 때 통증이 심하게 찾아오면 아버지가 날더러 주사해 달라는 부탁까지 한다.
나는 통증을 참느라 일그러져 있는 아버지 얼굴을 보며 차마 거절을 할 수 없어, 누나의 등 뒤에서 본 걸 흉내 내어 한 치의 망설임도 그리고 겁도 없이 주사기를 잡고선 불법 의료 행위를 했었다.
나의 대학시절엔 항상 용돈이 넉넉하지 못했다.
집안 생활비는 누나들의 봉급에서 나왔고 내 용돈 또한 누나가 줬기 때문이다.
때론 집안형편을 잘 알면서도 용돈을 더 달라고 누나에게 떼를 쓴 기억도 난다.
난 음악을 유난히 좋아했고 고등학교 시절엔 같은 학급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가 전축을 장만했으니 구경을 가자 길래 따라나섰다.
난 그 집에서 스테레오 전축소리에 반해버렸다.
물론 외갓집에 스테레오 전축이 있어서 들어보긴 했어도 이번엔 느끼는 감도는 달랐다.
그 전축의 주인은 공업계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인데 교동시장에서 전자부품을 사다 손수 조립해서 만든 거란 말을 듣고선 나도 공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해 봤다.
당시에는 팝송과 영화 음악을 많이 들었지만 나에겐 스테레오 음향의 오디오가 없고 모노음향의 카셋테이프 플레이어가 전부였으나 음악 방송을 즐겨 듣곤 했었다.
대학을 입학하고서 어머니가 나에게 갖고 싶었던 스테레오 전축을 사주었다.
나는 넉넉지 못한 학생주머니 사정이기에 정품 레코드 음반 구입은 꿈도 못 꾸고 음반 판매점을 돌아다니며 스크래치 소음이 섞인 복사판 음반을 구입해서 들었고, 또 그 시절에는 음반 판매하는 가게에 내가 듣고 싶은 곡명을 적어주면 돈을 받고 테이프에 그 곡들만 선곡해서 녹음을 해준다.
기분이 울적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오디오 음향을 한껏 올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듣곤 했다.
그 소리는 거동이 불편해 안방에 계시는 아버지 귀에는 큰 소음으로 전해 졌겠지만 아버지는 소리를 낮추라는 등의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시던 것이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난 이후부턴 더 짠하게만 느껴진다(지금의 내 자식이 그 정도의 볼륨으로 시끄럽게 음악을 틀고 있다면 나는 즉시 볼륨을 줄이거나 이어폰을 사용하라면서 나무랐을 건데_아빠는 정말 볼륨을 크게 틀던 나를 나무랐다).
한때는 이따금씩 들러보는 음악 감상실 뮤직 박스 안에서 볼 수 있던 DJ는 음악을 좋아하는 나로선 너무나 해보고 싶은 꿈의 직업이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들으면서 음악에 대한 정보도 나눠주며 살 수 있다는 것이 한없이 부럽게만 느껴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혼자서도 음악감상실로 발길을 돌려 어두운 배경과 함께 음악에 심취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