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우리는 먼저 꽃을 본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계절. 아직 다 풀리지 않은 찬 공기 속에서 연둣빛 꽃망울이 톡 하고 터진다.
벚나무 아래를 걷는 사람들의 눈빛엔 설렘이 가득하다. 그 풍경 안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떠올린다.
첫사랑, 어린 시절, 오래된 편지, 혹은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얼굴.
봄꽃은 그렇게 피어난다. 단정하고, 순식간에, 아주 가볍게.
흩날리는 벚꽃 잎을 보면 문득, ‘지금 이 순간도 곧 지나가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친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그래서 더 사랑받는다.
나는 오랫동안 봄꽃이 제일 예쁜 꽃이라고 생각해왔다.
가장 먼저 우리에게 계절을 알려주는 존재, 기다림의 끝에 만나는 기쁨.
그 특권이 봄꽃에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이름만으로도 마음속에 어떤 장면 하나씩 떠오른다.
봄꽃은 감정을 데리고 온다.
그래서 봄은 항상 이야기의 시작이 된다.
누군가의 고백, 새로운 출발, 오래된 관계의 복원.
모든 설렘은 봄에 몰려 있다.
하지만 여름이 오면, 꽃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니다.
햇살은 점점 세지고, 사람들은 그늘을 찾는다.
초록은 진해지고, 나뭇잎은 키를 키운다.
그 와중에 여름꽃들은 조용히 피어 있다.
백일홍은 마을 길가에서 묵묵히 피고, 능소화는 담쟁이처럼 벽을 타고 오르며 누구의 시선도 바라지 않는다.
해바라기는 한낮의 태양을 마주 보며 서 있고, 연꽃은 수면 위에서 고요히 자신을 펼친다.
그 어떤 꽃도 소란스럽지 않다.
피어나되 조용히, 견디되 흔들림 없이.
여름의 꽃은 봄처럼 한순간의 찬사를 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여름꽃 앞에 멈춰 서지 않는다.
눈이 먼저 닿는 곳은 더운 바람, 얼음이 담긴 컵, 그늘 아래의 의자일 뿐이다.
꽃은 풍경 속에 숨어 있고, 누군가는 그 존재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계절을 지나친다.
나는 한동안 그런 여름꽃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굳이 저렇게 더운 날에 피어날까.
왜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계절에, 그렇게 정성스럽게 피는 걸까.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여름꽃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여름, 바람도 없는 오후.
무심히 걷던 골목길에 빨갛게 피어 있는 접시꽃 앞에서 나는 발을 멈춘 적이 있다.
그 꽃은 아무도 없는 시간에도 당당하게 피어 있었다.
그늘 없이 서 있는 모습이 묘하게 안쓰럽고, 그 안쓰러움이 왠지 나를 닮은 것 같았다.
봄꽃은 설렌다.
누구든 한 번쯤은 벚꽃 아래에서 사진을 찍고, 손을 맞잡고 걷는다.
하지만 그 기억은 빠르게 흐려진다.
너무 예뻤던 것들은 금방 지나가고, 그 자리에 허무만 남을 때도 있다.
그래서 봄꽃은 아름답지만, 어쩌면 조금은 잔인하다.
반면 여름꽃은 오래 피고, 오래 견딘다.
그 뜨거운 태양을 정면으로 맞고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묵묵히, 묵직하게, 아무 말 없이 계절의 한가운데를 지킨다.
그래서 여름꽃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한 번 마음에 들어오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삶도 그럴지 모른다.
누구나 봄꽃 같은 시절을 꿈꾼다.
화사하고, 사랑받고, 중심이 되는 순간.
하지만 우리의 많은 날들은 여름꽃처럼 피어난다.
주목받지 않아도, 자신의 시간을 성실히 살아내는 사람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꿋꿋이 서 있는 존재들.
그렇게 버티고, 피고, 또 지고.
그래서 더 깊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요즘 나는 여름꽃 앞에서 자주 멈춰 선다.
마치, 내 안의 무언가가 그 꽃을 알아보는 것처럼.
누군가는 봄을 닮았고, 누군가는 여름을 닮았다. 당신은 어떤 꽃의 얼굴을 하고 있나요? #삶 #봄꽃 #여름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