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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 속삭임 Sep 14. 2024

동화 '보리와 임금님'에는 '보리'가 없다

원제보다 우리나라식 제목

어린 시절, 우리 어머니는 동네로 돌아다니는 책 장수에게서 문고판 동화집 한 질을 사셨다. 내가 글을 읽기 전에 사셨기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 책을 읽고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분명 그 책들은 저렴하지 않았을 텐데, 아마도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르르 사니까 어머니도 사셨을지 모른다. 그 동화책은 계몽사판 소년소녀 세계 명작 문학 전집 50권이었다. 책이 낡아 다 해질 때까지 읽었으니, 그 책들은 나를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동화집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그리스 로마 신화, 성경이야기. 나라별 전래동화와 창작동화들이 가득했다. 그 책들 중 한 권인 <보리와 임금님>은 영국 여성 시인이자 아동문학가 엘리너 파전(Eleanor Farjeon)의 창작 동화집으로  원제는 <작은 책방(The Little Bookroom)>이다. 동화집 속의 한 이야기가 있는데 제목이 '보리와 임금님'이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동네 교장 선생님의 아들 '착한 윌리(Simple Willie)'는 원래부터 멍청한 아이가 아니라 영리한 아이였다고 한다. 교장 선생님은 아이를 더 명석하게 키우기 위해 책도 많이 읽히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지만, 어느 순간 윌리는 공부에서 멀어지고 책에서 손을 놓았으며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영리한 윌리가 어느 순간 '착한-영어로는 Simple, 여기에선 바보 같다는 뜻-윌리'가 되어버렸고, 아이가 10살이 되었을 때 교장 선생님은 이제 자신의 아이가 영재가 아니라 둔재임을 깨달아 버렸다. 윌리는 착한 심성에 멋진 외모를 가진 아이였고, 동화 속 화자인 '나'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17, 8세쯤 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착한 윌리'라는 별명을, 그의 아버지인 교장 선생님은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착한 윌리'라는 애칭으로 그를 부를 때 더없이 사랑을 담아 부르는 듯했다고 화자는 말한다. 윌리가 화자와 처음부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화자가 인사를 해도 윌리는 그저 빙긋 웃을 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윌리가 화자와 대화를 했다. 아니, 정확히는 윌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 이집트에 살면서 농사지은 얘기를 시작한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버지의 보리밭을 보며, 자기 아버지가 이집트에서 제일 부자로 생각했던 단순한 이야기 속의 윌리. 그런 윌리가 어느 날 보리밭에서 이집트 임금님을 만난다.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그 임금님을 이야기 속 윌리는 '라'임금님이라고 불렀다(이집트 신화에서 라(Ra)는 태양신의 이름이며, 파라오는 '라'의 현신 혹은 후손으로 불렸다).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보리를 씹는 윌리에게 임금님이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다. 윌리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했고, 임금님은 다시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다. 이야기 속 윌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이집트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이라 말했다. 임금님은 다시 그의 아버지가 왜 부자인지 물었고, 그는 이 보리밭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이집트에서 가장 부자라고 말했다. 라 임금님은 자신은 이집트를 소유하고 있다며, 자신이 가장 부자라고, 자신이 가장 위대하다고 말했다. 평범한 무명옷을 입은 이야기 속 윌리는, 이집트를 다 소유한 임금님이 가장 부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라 임금님의 휘날리는 비단 망토에도 불구하고 황금빛 보리밭을 가진 자신의 아버지가 가장 부자라고 확신했다. 이에 화가 난 라 임금님은 부하를 시켜 보리밭을 몽땅 태워버린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집트에서 가장 부자이고 위대하다며 이야기 속 윌리를 떠난다.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왜 임금님이 우리의 보리밭을 태웠을까 하지만, 이야기 속 윌리는 아무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도 영문을 몰랐고, 그래서 그는 집 뒤에서 울었다. 우는 그의 손바닥에, 임금님과 얘기할 때 그가 씹고 있었던 보리 낟알 몇 개가 붙어 있었다. 현재의 농사는 망쳤어도 이듬해 다시 농사를 지을 때 이야기 속 윌리는 그 손바닥의 보리 이삭 몇 알을 심었고, 보리밭은 다시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났다. 황금빛 보리보다 더 위대하고 부유했던 라 임금님은 결국 사망했고, 많은 껴묻거리와 함께 사후 세계로 가게 되었다. 임금님의 사후 어떤 사람이 이야기 속 윌리의 집에 들르게 되는데, 그는 라 임금님의 무덤에 껴묻거리로 여러 가지 곡식을 거둬 가는 중이라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야기 속 윌리는 자신의 보리밭에서 보리 몇 이삭을 베어 그 사람의 곡식에 섞어 넣는다. 그리하여 그의 보리가 라 임금님과 함께 묻혔다. 후에 라 임금님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그 보리도 함께 나왔으며, 이야기 속의 윌리는 그 보리가 옛날 자신이 라 임금님의 무덤에 넣은 것이며, 후에 그것을 직접 보게 되었고, 어쩌다 그 보리 중 하나가  그의 손바닥에 붙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 속의 윌리는 지금 화자에게 이야기하는 착한 윌리가 되어 그때의 보리를 지금의 보리밭에 심었다고 화자에게 말한다. 화자는 윌리에게 저 보리밭에 그때의 보리가 있느냐고 물었고 착한 윌리는 유난히 황금빛으로 빛나고 키 큰 보리 이삭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순진하게 묻는다. "이집트 임금님과 보리, 어느 쪽이 더 황금빛이야?"라고.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략의 이야기는 이랬다. 어쩌면 '착한 윌리'는 허언증이나 과대망상증 환자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정도였겠지만. 이야기의 진짜 의미는 각자가 다르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단편 동화의 제목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읽었고 번역된 것이 모두 '보리'로 되어 있어서 영어 원제목도 'The King and the Barley'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엘리너 파전의 <작은 책방>을 원서로 읽으면서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동화의 원제는 'The King and the Corn'이었다. 그러니까 '임금님과 옥수수'가 원제인데 어느 시점에서 '보리'로 바뀐 것일까. 이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옥수수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장면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집트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옥수수밭을 말할 때, 우리나라의 정서로는 그 옥수수밭을 이야기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옥수수를 그렇게 대규모로 심은 밭이 그 당시에는 아마 없었던 탓일지도 모른다. 이집트의 날씨를 생각하면 따뜻한 햇살 아래 황금빛으로 빛나는 옥수수밭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여름에 그런 황금빛으로 빛나는 밭을 떠올리자면 보리밭이 단연코 우선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름의 황금빛 보리밭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4월이면 제주 가파도에서 청보리 축제가 있는데, 한쪽에서는 청보리가 황금빛으로 익은 황금 보리밭도 펼쳐진다. 그 모습을 보면 정말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듯한 느낌이다. 햇살에 반짝이는 황금빛 보리를 보면.

여름의 황금빛 보리를 보면 아주 옛날 어느 시골길을 가다가 만난 보리밭이 생각난다. 아마도 저녁 햇살을 받은 보리밭이었는데, 보리는 벼와 달리 익어가는 시점까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다. 그래서 초여름 저녁 햇살 아래 꼿꼿한 보리들이 가벼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여전히 내 기억 한편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 황금빛 보리에 대한 추억을, 'The King and the Corn'을 '보리와 임금님'으로 번역한 번역가도 똑같이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의 오류를 밝힙니다^^

corn의 사전적 의미는 '곡식, 낟알'이라 합니다. 사전을 조금만 찾아보면 되었을 것을, 저 작품을 영어로 읽으면서도 그 생각을 못했네요. 

댓글로 알려주신 작가님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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