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 강변 둔치
그 작은 섬과 포플러나무 숲
우리 동네 앞에는 큰 둑이 있었고 그 위로 도로가 지나고 있었다. 지금은 아주 좁은 2차로 옛길이지만 그때는 그 길이 주된 도로였다. 그 옛날엔 차가 많지 않아서 그 강변도로에는 드문드문 차가 다녔었다. 그 도로를 지나 내려가면 드넓은 둔치가 펼쳐진 강가에 닿는다. 지금처럼 단정하게 정리된 둔치가 아니라, 그저 온갖 잡풀이 무성하게 돋아난 커다란 공간이었다. 그 둔치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세워진 댐 이외의 또 다른 댐이 세워지기 전에는 매년 홍수로 잠기곤 했었다. 강변도로를 넘어 마을을 덮칠 정도의 홍수는 나지 않았지만, 여름에는 홍수가 난 모습을 강변도로 둑에서 내려다 볼 정도로, 그 둑의 2/3 높이까지 위험스럽게 물이 들어찰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만 빼면 강변 둔치는 거의 내 어린 시절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은 잊혀져 버린 풀내음에, 봄이면 달래, 냉이, 씀바귀를 캐고 그 풀밭에서 통통한 삐삐-삘기라고도 불리는, 정식 명칭은 '띠'의 새순 속 부분으로, 감싸고 있는 풀잎을 벗기고 속을 꺼내 씹으면 달착지근한 물이 나와서 껌처럼 씹기도 했다-를 골라 씹으면서 주야장천 쏘다녔었고 여름엔 얕은 강가에서 매일 물놀이를 하기도 했던, 반딧불이가 날아다녔던 그 둔치. 가을은 딱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마도 매번 그 강가의 포플러 숲 산책을 나가기도 했었지 싶다. 겨울의 한 장면 중에, 꽁꽁 얼었던 강의 얼음판 위를 걸었던 기억도 있다. 물론 이건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 강가에 혼자 나가서 놀기도 했던 것 같다. 대부분 친구들과 놀았지만 어떤 날은 정말 고요한 강가에서 나 혼자 놀기도. 얕은 여울을 빠르게 헤엄치는 피라미나 붕어를 잡기도 했고, 혼인색 선명했던 수컷 피라미-고향에선 쑤루메기라 불렀다-의 무지갯빛을 따라 물속을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강조개, 재첩, 다슬기, 모래무지, 납자루, 돌고기, 버들치, 동사리... 이름은 나중에 알게 된 물고기들도 많이 잡기도 했었던 그때, 강은 내게 오히려 무척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강 한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어서, 얕은 곳을 찾아 건너가면 마치 새로운 세상에 가는 것처럼 재미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친구들과 함께 그 섬에 들어가서 요리조리 쏘다니며 그 작은 섬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뒤적이며 놀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렇게 섬에서 놀다가 댐에서 수문 개방 사이렌이 들려올 때는 다들 토끼처럼 뛰어서 안전한 둔치로 뛰어오곤 했었다. 지금은 고향집의 강변 쪽으로 나가보면, 어릴 시절의 강 한가운데 섬이 있었던 곳쯤까지 새로운 넓은 도로가 닦여져 있다. 옛날 강변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곳에 새로이 둔치공원이 조성되어 사람들이 운동이나 산책하는 모습도 보인다. 모든 것이 달라진 이곳에서, 어느 날 강은 딱 하나 익숙한 장면을 만들었다. 현재 강의 가운데쯤에, 그 옛날만큼 크지는 않지만, 섬 하나를 만들었다. 그 섬을 보면, 아주 오래전에 뛰어놀던 그때의 섬이 생각난다. 그때만큼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예전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는, 갯버들과 푸른 풀들이 흰모래를 딛고 솟아있는 곳. 억지로 조성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다시 만들어진 그 섬을 볼 때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의 조각들이 그림 맞추기처럼 끼워지곤 한다.
그리고 오래전 그 둔치에는 아름드리나무가 여러 그루 솟아있는 숲이 있었다. 그리고 숲이 끝나는 곳에는 널찍한 운동장처럼 보이는 공간이 펼쳐지는데 그곳엔 국기 게양대가 있었던 흔적이 있는, 부서진 시멘트 기단이 있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군사훈련이 이루어지기도 했다고 하며 이 넓은 공간은 연병장이었다고 알려졌지만, 내가 어렸을 적엔 이미 그곳은 훈련장으로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그저 강변 둔치의 넓은 공간일 뿐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조성되어 있었던 그 아름드리나무 숲의 나무는 족히 스무 그루 이상은 되어 보였다. 어린 내 눈에 그 나무들은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키 큰 나무들은 모두 포플러 나무였다. 봄이면 새싹이 돋았고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으며 가을에는 낙엽이 지는 포플러 나무 숲은, 알음알음하여 돗자리를 들고 소풍 나오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둔치에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심어진 포플러 나무 숲은 상당히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연병장이었던 곳의 옆자리였으니 이 나무들도 군사훈련에 사용되었던 것이었을까. 이미 건설된 댐으로 인해 안개가 끼는 일이 유독 잦았던 그 숲은, 안개가 가득하면 또 다른 풍경을 자아냈다. 미지의 어딘가로 통하는 문이 있을 것 같은, 아니면 낯선 곳에서 낯선 손님이 찾아올 것 같은, 또 아니면 무엇엔가 홀린 듯 정처 없이 헤맬 듯한 그런 풍경을.
그러나 또 다른 댐이 강의 반대편 상류 쪽에 새로 건설되고, 그 소도시의 규모가 조금씩 커져가면서,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포플러 나무들이 한 두 그루씩 잘려 나가면서, 어느 시점에선 숲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그게 둔치 개발이었는지 아니면 나무에 병이 들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갑자기 사라진 그 포플러 나무 숲이 아주 가끔씩 그리워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풀숲이 아니라, 잘 조성된 정원 같았던 키 큰 나무들이 신비로운 섬처럼 서 있었던 그 숲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