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갑오띠기
당신만의 놀이로 시간 보내셨던 아버지
모든 집에 한벌씩은 있는 화투. 트럼프 카드보다 크기는 작지만 단단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화투는 짝짝 때리는 맛(?)이 있는 어른들의 놀이 도구이다. 틀에 박힌 모습으로 정해진 킹, 퀸, 잭의 그림, 하트, 스페이드, 다이아몬드, 클럽 모양대로 A(1)부터 10까지 규칙적으로 그려진 총 52장의 카드에 조커 한 장까지 총 53장인 코팅된 종이트럼프 카드와는 달리, 한 손바닥에 숨겨지는 작고 딱딱한 플라스틱의 화투는 다채로운 12종류의 그림이 조금 촌스럽지만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19세기에 일본에서 전해진 카드놀이 하나후다[花札]의 변형으로 여겨지는 화투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서민층에 퍼졌다고 하며, 현재 화투패의 그림은 1950년대에 확정되었다고 한다. 화투패에는 여전히 일본의 대표 명절과 함께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과 나무가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고 그래서 여전히 일본풍이다.
고스톱이나 또 다른 무수한 도박에 사용되기에 다소 부정적인 느낌을 가져다주는 화투는 그러나, 설날이나 추석 때 아이들을 물리고 친척 어른들과 아버지께서 가끔씩 마지막에 재미로 하시던 어른들의 놀이였다. 그때 어른들은 화투놀이로 딴 돈을 아이들 용돈으로 쥐어주시곤 하셨다. 나는 민화투와 고스톱을 사촌 오빠들한테서 배웠다. 누나들만 있었던 사촌 오빠들은 어린 여동생인 나를 무척 예뻐했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옛 놀이들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중에 민화투와 고스톱이 있었다. 어린이가 배우기에는 다소 좋지 않은 것이었지만, 한겨울 놀잇감이 없는 시골의 아이들에겐 나름 예쁘장한 그림의 화투는 재미있는 장난감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사촌 여동생에게 하나씩 가르쳐주는 것도 사촌 오빠들에게는 재미있는 놀이었을 테고.
우리 집에도 화투가 있었다. 아버지의 머리맡의 어딘가에 있었는데, 일을 마치고 오신 아버지께서 저녁 식사 이후에 시간을 보내실 때 가끔씩 화투를 꺼내 무엇인가에 계속 집중하시곤 했다. 뭔가 골똘히 암산하시듯 화투장을 보시다가 세 장을 걷어내고 다시 한 장씩 펼치며 눈으로 계산하시고 걷어내는, 무척 단조로워 보이는 그 놀이를 꽤 집중해서 하셨다. 무슨 놀이인지 여쭤봤을 때 아버지는 답해주지 않으셨다. 나중에 언니들에게 물어보니 갑오띠기라는 것이었다. 갑오떼기의 경상도식 발음이 아마 갑오띠기이지 싶은데, 화투 세 장을 합했을 때 9, 19, 29를 맞추는 놀이이다. 다섯 줄로 놓은 화투장을 차례대로 놓아가며 세 장의 합을 저렇게 맞추는데, 세 장이 넘어가면 첫 번째 장과 끝의 두장의 합을 저렇게 맞췄다. 11과 12인 오동과 비는 나오게 되면 버린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집중하셨던 것은 화투장의 숫자를 되새기며 암산하셨던 것이었다. 갑오띠기, 갑오떼기는 화투로 재수떼기 하는 것으로 다섯 줄로 놓은 패가 다 정리되면 재수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라 한다.
트럭 운전을 하셨던 아버지에게 담배와 탁주 이외에, 아마도 갑오띠기는 혼자만의 시간에 깊이 집중할 수 있는 놀잇감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아버지들은 지금의 아빠들처럼 다정하거나 아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표현하시지 않으셨다. 우리 아버지는 가장으로 이끌어야 할 식솔들이 많았기에, 일을 하고 온 저녁 시간은 가끔씩 혼자만의 시간 속에 빠져 갑오띠기를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당신의 짐이 너무 무거웠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반신불수로 살아가시게 되면서 갑오띠기는 아버지에게서 멀어졌고 잊혀져 갔으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내게서도 잊혀졌었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고향집에 갔다가 손에 쥐어본 화투를 보니, 오래전 안방의 당신 자리에 앉으신 채로 갑오띠기를 하고 계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얼핏 생각났다. 그때의 아버지는 재수가 좋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갑오띠기를 하셨을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