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여의 꽃을 접었었다
큰 당숙의 집에서 있었던,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옛날식 장례
내가 어렸을 때,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숙모 그러니까 내게는 종조모님이 돌아가셨다.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집성촌에 있는 큰 당숙의 집으로 작은 당숙들과 육촌 형제들이 모였다. 그때는 지금과는 다르게 육촌 형제들은 매우 가까운 친척이었다. 요즘은 사촌 간에도 데면데면한 경우가 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당숙들, 그러니까 아버지의 사촌 형제들이 상주였으니 당시에는 당연히 집안의 행사였다. 그리고 종조모님은 작은 집성촌이었던 그 마을 우리 집안에서 가장 어르신이었던 분이었고 그래서 종조모님의 장례식은 우리 식구들도 당연히 참석해야 하는 것이었다. 같은 마을에 계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도 오셨고, 사촌오빠들도 학교에 다녀온 오후에 큰 당숙의 집으로 모였다. 일을 하셔야 하는 우리 아버지는 저녁에 오시기로 하셨고, 여자 형제가 많은 우리 집에서는 그때 어렸던 나와 남동생이 어머니를 따라 큰 당숙의 집에 갔다. 육촌 형제 중에 나와 동갑인 여자아이가 있어서 나는 그 애와 꽤 친했다. 큰 당숙의 집에서 치러진 이 장례식은 그녀의 할머니, 내 종조모님의 장례식이었기에 나는 그녀와 함께, 작은 방에서 놀고 있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작은 방 뒤에 있는 창고처럼 쓰였던 방에서 육촌언니들이었는지 아니면 그 집성촌 동네 먼 친척들이었는지 모르지만, 무엇인가를 곱게 접고 있었다. 그녀들의 손에서 예쁘게 접힌 것은 하얀색과 노란색, 진달래 분홍색의 커다란 꽃이었다. 마치 사물놀이패의 고깔모자를 장식하는 것과 같은 커다란 꽃들이 방에 가득히 놓여있었다. 그녀들은 내게 그 얇은 한지를 건네며 접어보라고 했다. 한지를 접어 겹치고 예쁘게 잘라내어 만들었던 것 같은데, 어린 내게는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결국 내가 만든 예쁘지 않은 꽃은 못쓰게 되었지만 그것을 보며 그녀들은 웃기도 했고 그러면서 열심히 꽃을 만들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꽃들은 돌아가신 종조모님의 상여를 장식할 꽃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상여를 장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지금은 다큐멘터리에나 나올 것 같은 상여 행렬이 이뤄지고 있었다. 나는 어린 여자 아이인지라 그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아주 가끔은 그날 종조모님의 장례행렬에서 들려오는 그 단조롭고 서글픈 노래와, 그 뒤를 따라 여인들이 만들어 낸 그 하얗고 붉고 노란 종이꽃들이 가득히 장식된 채 조금씩 흔들리며 지나가는 상여의 모습이 찰나의 기억으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갈 때가 있다.
큰 당숙의 집은 볕이 잘 드는 커다란 마당이 대문 없이 사람들을 맞이했다. 마당과 집안을 구분해 주는 어른 무릎 높이의 아랫벽 위의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당시 이쪽 지방의 집 형식처럼 한쪽에는 댓돌이 있는 좁은 공간이 있고 거기에서 오른쪽 조금 내려서게 되는 곳에 부엌과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었다(이런 집의 형식을 겹집이라 부른다고 한다). 부엌 맞은편에 외양간이 있었던 우리 큰집과 달리, 큰 당숙의 집에는 작은방이 있었고 그 아궁이는 밖에 있었다. 그 시절 큰집 동네나 외갓집 동네들은 여전히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전통식 구들이 있는 옛집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신발을 벗은 다음 댓돌을 딛고 대청마루에 오르면 부엌이 있었던 오른쪽에는 큰방이, 왼쪽 작은 방 뒤쪽에는 커다란 뒷방이 있었는데, 그 뒷방은 거의 창고로 사용되었다. 대청마루의 끝은 커다란 문이 열려있어 뒤뜰로 내려갈 수도 있었다. 큰 당숙의 집은 '새터'라 불렸다. 그 집은 큰집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고 그곳에는 몇 가구가 모여사는 새로운 작은 동네가 만들어져 있었다. 큰집이 있는 앞쪽 큰 동네보다 늦게 작은 마을이 만들어져서 아마 '새터'라 불렸던 모양이다. 큰 당숙의 집 뒤뜰은 해가 잘 드는 넓고 따뜻한 곳이었다. 우리 큰집은 약간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서 강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멋진 곳이었지만, 집은 조금 불편했다. 그에 비해 큰 당숙의 집 앞은 논이 펼쳐져있는 약간 낮은 지대의 오히려 평온한 풍경을 담은 곳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명절 때가 되면 큰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당신의 사촌형제들까지 모두 함께 정해진 순서대로 집들을 방문하여 차례를 지내고 그 집들에서 준비한 음식을 한 자리에 앉아 먹곤 했다. 설날에는 떡국을, 추석에는 비빔밥을 먹었는데 조금 과장하면 설날 오전에 떡국은 기본 네 다섯 그릇은 먹어야 했다. 추석 때는 성묘를 가야 했기 때문에 각자의 집에서 밥을 먹고 다 함께 모여 성묘 순서에 따라 산으로 갔지만. 어쨌든 그때는, 아버지와 당숙들은 모르고 사는 남이 아니라 당연히 함께 모든 대소사를 함께 하는 가족이었다. 명절의 마지막은 그래도 그 당시에는 시내에 있었던 우리 집에서 끝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늘 명절의 마지막엔 고모와 고모부, 당숙들과 당숙모들이 우리 집에 모여서 명절놀이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지금은 차로 5분 이내에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그때 큰집이나 큰 당숙의 집이 있었던 집성촌은 버스가 일찍 끊기는 곳이었고 고모부의 집도 시내에서는 버스가 그나마 자주 있는 곳이었다. 우리 집은 시내에서 출발하는 거의 모든 버스를 타러 가기에 적합한 곳에 위치해 있어서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육촌 형제들까지 당연히 집안사람들이었던 그때는 그렇게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게 그 당시의 정(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은 없다. 사촌 형제들까지, 그리고 함께 놀았던 육촌 형제들까지 알고는 있지만, 육촌 형제들과의 교류가 끊어지고 나서는 연락이 없고 당숙들도 거의 돌아가신 데다가, 우리 어머니만이 가끔씩 당숙모들을 만나실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촌형제들도 맏이들 간에 연락이 되는 것 빼고는 딱히 서로 연락을 하지 않는 사이인지라, 지난해 큰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사촌형제네 가족을 만났을 때는 오히려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게 세월의 흐름이었고 시대의 표현이었으니까. 반세기도 안 되는 시간 속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음에도, 여전히 가끔씩은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역시 나는 옛날 사람인 것일까. 그 옛날이 그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가 떠오른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