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18세기 경)-최북
18세기 조선 화가 호생관(毫生館) 최북의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18세기 경)>. 어둑한 하늘 아래 눈이 그려져 있지 않아도 그 여백으로 짐작되는 눈 덮인 산이 자리하고 있다. 높은 산에서 시선을 내리면 세찬 바람에 흔들려 한쪽으로 기운 듯한 나무들이 보이고 그 나무들 사이에 집이 한 채 있으며, 사립문을 넘어 개 한 마리가 나와 짖고 있다. 개의 시선이 닿는 곳에 선비 하나와 시동 하나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일까. 개 짖는 집 앞을 그저 지나치는 것을 보니 선비의 집은 그쪽이 아니라 좀 더 먼 길을 가야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림에 표현된 선을 자세히 보면 붓으로 그린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붓이 주는 정돈된 느낌보다는 약간은 투박한 느낌이랄까. 찾아보니 이 작품은 '지두화(指頭畵)'이다. 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다. 손가락만으로 여백으로 비워둔 눈,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 나무의 크기, 가지, 산수의 농담에 자그마한 인물들과 개까지 어찌나 잘 표현했는지. 작품의 내용은 중국 당나라 시대 문인 유장경의 시 '봉설숙부용산(逢雪宿芙蓉山)'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 시는 시인이 눈 때문에 산 아래의 초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경험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日暮蒼山遠(일모창산원)
天寒白屋貧(천한백옥빈)
柴門聞犬吠(시문문견폐)
風雪夜歸人(풍설야귀인)
날이 저물고 푸른 산은 먼데
차가운 하늘 밑 시골집이 쓸쓸하네
사립문에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
눈보라 치는 밤에 돌아온 사람
그런데 시의 내용은 '눈보라 치는 밤에 돌아온 사람'이나, 그림 속에는 '돌아가는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다. 같은 제목의 중국의 그림에는 '돌아온 사람'을 표현하는데 이 작품은 '돌아가는 사람'으로 표현된 것은, 화가 자신의 삶을 그린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 한다. 최북을 검색하면 '여항(閭巷) 출신 직업 화가'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여항(閭巷)'이란 평범한 백성이나 중인을 가리키는 말로 그 역시 중인 출신의 화가였다는 것인데, 이는 천재적 재능을 지녔으나 이를 널리 펼칠 수 없었던 태생적 한계가 그를 당대의 기인(伎人)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평생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다가 눈 오는 어느 겨울날, 열흘 굶은 이후 그림 한 점 팔아 술을 사 마시고 홑적삼 차림으로 눈 속에서 얼어 죽었다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설명이 가장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조선 영조 시대 화가 호생관(毫生館) 최북은 여항(閭巷) 출신 직업 화가로 알려져 있다. 중인 출신이기에 정치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그는 소론계, 남인 문인학자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시서화에 능숙한 화가로 대담하고 파격적인 자신만의 양식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또한 당대의 기인(伎人)이기도 하였다. 심한 술버릇과 갖가지 기이한 행적으로 최북은 수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금강산 구룡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술을 잔뜩 마시고 투신을 했다던가, 어떤 귀인이 그림을 요청했다가 얻지 못하여 그를 협박하려 했을 때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며 스스로 눈 한쪽을 찔러 멀게 했다는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 괴팍하고 천재적인 화가가 자신의 눈을 찌른 이야기는 네덜란드 화가 고흐가 귀를 자른 이야기와 연관 지어 생각되기도 하여 그를 '조선의 고흐'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흐보다 먼저 태어나 활동한 사람이지만 이 일화는 고흐보다 늦게 알려진 탓이기도 하다. 자신의 그림값이 생각보다 적을 때는 그림을 찢어버렸고, 생각보다 많을 때는 그림값을 낸 사람을 문밖으로 밀어내며 그림값을 도로 주고는 핀잔하며 돌려보냈다든지, 자신의 그림은 그 가치를 아는 이에게만 판다고 하였다든지 하는 것은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림을 두고 타협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던 화가 최북. 자신의 이름 '북(北)'을 파자하여 스스로 '최칠칠(崔七七)'이라 칭하고 다녔던 그는 그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한 그림을 그리고서도 돈과 권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눈 오는 어느 겨울, 열흘을 굶은 후 겨우 그린 그림을 팔아 술을 사 마시고 홑적삼 차림으로 눈 속에서 얼어 죽었다고 한다. 최북에 대해서는 알려진 자료가 많이 없고 그의 성격이나 기이한 일화들만 전해지는 것이 한계이기는 하지만, 그는 이전의 대가들의 화풍을 계승하고 변천시켜 자신만의 대담하고 파격적인 양식을 이룩했으며, 조선 후기 회화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이 작품은 개인 소장으로 알려져 있다. 정보와 이미지는 네이버 검색을 참고하고 내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