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집, 그리고 낯선 동물
윗동네에는 칠면조가 있었다
고향집이 있는 그 작은 마을에도 엄연히 앞동네, 뒷동네, 윗동네 아랫동네가 있었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풍수지리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마을의 남쪽이 앞, 북쪽이 뒤, 동쪽이 위, 서쪽이 아래라고 칭해졌다. 우리 집은 뒷동네와 아랫동네에 속해있었다. 우리 집은 앞 동네에서 보면 골목 끝의 두 번째 집이었고, 뒷동네에서 보면 골목 시작의 두 번째 집이었다. 우리 집이 있는 골목의 뒷동네 첫 집, 그러니까 우리 집의 뒷집은 그때 동네에 단 두 개 있었던 가겟집 중 하나였다. 지금도 그 집 노부부를 '담뱃집'이라 통칭하여 부른다. 어린 시절엔 아버지 담배 심부름으로 그 담뱃집에 가곤 했다. 지금은 아이가 담배를 사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지만, 그때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버지 담배 심부름, 술 심부름을 그렇게 다녔고 누구네 집 아이인 것을 알았기에 당연히 그 심부름은 받아들여졌다. 아직까지도 아버지께서 피우시던 그 담배가 기억난다. 하얀 담뱃갑에 붉은 낙관처럼 인쇄된 소나무, 그리고 한글로 쓰인 한 글자 '솔'. 80년대를 풍미한 그 독한 담배는, 당시 가격으로는 비싼 500원이었는데도 아버지는 담배 심부름을 시키시곤 했다. 아마 그때 당신께서 유일하게 즐기실 수 있었던 사치품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적 그 담뱃집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고, 현재의 그 노부부인 그때의 젊은 부부는 노부모를 모시고 가겟집을 운영하면서, 동네의 위쪽에 있는 기차역 앞의 땅을 경작했었다. 그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여자애가 있었는데 이웃집이고 나이도 비슷해서 우리는 자주 함께 놀았다. 가끔은 그 애를 따라 그 애 부모님이 경작하는 밭에 가기도 했다. 그 밭에 가려면 늘 지나가야 했던 기차역의 관사가 있었는데, 그 집에는 기묘한 소리를 내는 동물이 있었다. 뭐라고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아주 낯선 울음소리가 그 집에서 흘러나왔다. 처음 들었을 때 정말 사람 깜짝 놀라게 하는 그 소리만큼이나 낯설었던 이 동물의 생김새 역시 독특했다. 생전 처음 본 그 동물은 얼굴이 빨갛고 몸은 시커먼 새, 칠면조였다. 푸드덕 대며 날개를 펼칠 때는 좀 위협적으로 보였던 못생기고 커다란, 그 시절 그 마을의 칠면조는 무척이나 생뚱맞고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게다가 그 관사는 동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 지금 생각해 보면 지극히 일본식 옛집이었는데, 언덕 위에 있었기에 주변에 집이 하나도 없는 생경스럽지만 극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마치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나 나올 것 같은 그런 집이었다고 해야 할까. 여러 면에서 우리 동네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독특한 집에 그런 독특한 새라니. 칠면조와 그 관사는 마을의 유일한 특이점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집을 지나 밭으로 이어진 언덕을 내려서면, 비단 그 애의 부모님만은 아닌 온 동네 사람들이 경작을 하는 넓은 땅이 나왔다. 농사짓는 모습은 여느 시골과 다르지 않았고, 발아래로 느껴지는 땅은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 시절 그 땅은 나름대로 구획이 잘 지어져 있어서 마을 사람들 각자의 농사가 평온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그곳에서 경작하실 수 없었다. 그 땅은 공유지인 기차역 부지였지만, 이미 먼저 농사짓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곳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8톤 트럭 운전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었고 어머니는 돌봐야 할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농사지을 틈도 없으셨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오히려 내가 그 애와 함께 그 밭에 놀러 가는 것이 어머니의 신산한 삶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직은 공부보다는 한창 뛰어놀기를 좋아했던 때, 그 애와 함께 그 밭을 뛰어 돌아다는 것도 재미있는 놀이였다. 이미 아주 오래전에 그 모습을 잃고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그곳은 지금도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고향 마을에 들어서서 그 아파트 쪽을 바라보면 그때의 칠면조가 있었던 그 관사의 풍경이, 동시에 귓가에는 그 칠면조가 내던 기묘한 울음소리가 섬광처럼 떠오른다.
윗동네에는 칠면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