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꾸준히는 한계가 있다. 미친 듯이 몰입하는 시기가 필요하다. 매일 미치라는 건 아니고 한 시절은 반드시 미쳐야 한다.”
40년 구력의 관장님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친척이 하는 탁구장을 다니기 시작해, 중학교 3학년 때 최상위 부수인 1부가 되었다. 3년 내내 학교가 끝나면 탁구장으로 달려가 그 당시 흔치 않았던 탁구 선수 출신 형들과 탁구를 치고 자정이 되어서야 탁구장을 나왔다고 한다. 그중 한 명은 펜 홀더 전형이었는데, 어린 소년의 눈에는 그의 탁구 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단다. 탁구 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50대 후반인 관장님 입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그는 바로 초등학교 6학년 생이 된다. 한 소년이 형의 탁구 치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또래와 노는 게 한창 재미있었을 때인데 매일 탁구장으로 달려갔던 3년이 관장님에게는 탁구에 미쳐 있었던 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16년 구력의 3부 회원은 41세에 동사무소에서 운영하는 탁구장에서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거의 7년을 회사가 끝나자마자 탁구장으로 달려가 탁구장이 문을 닫는 10시까지 탁구를 쳤다고 한다. 그는 탁구 치는 게 너무 좋아 쉬는 시간 없이 연습하거나 게임을 했으며 자려고 누우면 천장이 탁구대로 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저녁 시간을 모조리 탁구에 쏟아붓자, 자연스럽게 3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7년이라는 시간이 탁구에 가장 미쳐 있었던 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10년 구력의 5부 회원은 취업 전 6개월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 그때가 탁구에 가장 미쳐 있었던 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탁구로 시작해서 탁구로 끝나는 나날들이었다고 한다. 아침 먹고 탁구 치고, 점심 먹고 탁구 치고, 저녁 먹고 탁구 치고. 당연히 탁구장 문 닫기는 그의 몫이었다고 한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다.”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미친 한 시절을 보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뿌듯함과 흐뭇함이 깃들어 있다. 이렇듯 미친 시절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기간이 누구에게나 존재하나 보다.
그럼, 내게 있어 탁구에 미쳐 있는 한 시절은 언제일까? 탁구를 시작한 지 4년 째인 난 이제야 탁구가 뭔지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탁구장에는 보통 오후 8시에서 10시 사이에 머물지만, 마음은 이미 탁구장에 가 있다. 틈만 나면 유튜브 영상을 보며 어떻게 하면 탁구를 잘 칠 수 있을까? 정보를 찾아 헤맨다. 책을 읽다가도 갑자기 탁구 생각이 나면 잊어버릴세라 바로 메모하고, 잠들기 전에는 오늘 했던 연습과 부족했던 부분을 복기하며 내일 해야 할 연습을 계획한다. 그렇게 우려했건만 모든 일상이 탁구를 기준으로 흘러간다. 마치 탁구와 연애하고 있는 것 같다. 연애하는 감정은 궁금해하는 감정이라는데 탁구란 요놈이 더 많이 알고 싶어 죽겠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이런 내가 낯설고 당혹스럽다. 공의 움직임에 저절로 반응하는 반사 신경에 ‘나한테도 이런 신경이 있었다고?’ 화들짝 놀란다. 평상시 타인처럼 멀게만 느껴지던 몸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네 몸 안에 이런 것도 있는데, 너는 반평생을 모르고 살아왔지?’ 몸이 물어 오는 것 같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꺼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내 안에 뭐가 더 있을까?’ 더 꺼내 보고 싶고, 더 알고 싶다.
그럼 내게는 지금이 그들이 겪었던 ‘미친 한 시절'인가? 그럼 이 미친 시절을 어떻게 통과해야 하지? 이러한 시기임을 인정함에도 탁구가 일상을 과도하게 잠식하는 게 두렵다. 지금 난 작가를 꿈꾸며 하루 루틴이 이 목표에 맞추어져 있다. 3년 동안 글쓰기로 미친 시절을 보내자고 마음먹었다. ‘글’이라는 굴을 깊이깊이 파 보리라 결심했다. 나 자신과 약속한 글의 양과 필사의 양, 한 달에 네 번 있는 독서 토론 모임을 위한 책 읽기, 글쓰기 방법론 공부 등 매일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이러한 일들 사이사이 탁구란 놈이 자꾸 끼어든다. 글을 쓰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게임 중에 이렇게 해야 했는데, 저렇게 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글쓰기에 미치고 싶은데 탁구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니 주객이 전도된 듯하다. 탁구에 대해 생각하는 게, 마치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죄책감마저 든다. 이성은 글쓰기를 외치고 있고, 몸과 마음은 탁구로 향해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글쓰기는 8, 탁구는 2의 비율로 균형 맞추기를 열망하는 내게 이 상황은 적색경보다. ‘탁구, 너 좀 저리로 가서 2의 비율로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이렇게 온종일 오매불망 탁구를 생각하는 미친 시절이 내 인생에 다시 찾아올까?’라는 의문도 든다.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 이렇게 연애하는 듯한 감정이 쉽게 오지 않는다는 건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이 나이쯤 되면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 따로 없다. 왜 탁구에 미쳐 있다고 말을 못 해? 지금이 나의 미친 한 시절이라고 인정하라고? 심리적인 벽이 이렇게 높을 줄이야! 일상이 탁구로 잠식당하면 좀 어때? 글쓰기가 조금 뒤로 밀리면 좀 어때? “매일 미치라는 건 아니고 한 시절은 반드시 미쳐야 한다.”라는 스승님의 말씀처럼 탁구에 미친 듯한 한 시절을 보내고 싶지만, 글쓰기에도 미치고 싶은 게 문제다. “세상의 갈등 중 많은 경우는 선의와 선의의 부딪힘 ” (문유석의 『최소한의 선의』)이라더니 탁구와 글쓰기 둘 다 서로 미친 시절을 보내겠다고 난리다. 그럼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