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저절로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아픈데 없고 건강하니 신경 쓸 문제라곤 일절 없으리라 생각했지요. 그것보다는 일을 좀 더 해야겠다고, 같이 벌 수 있는 지금이 최적기라는 판단하에 아이는 '생기면' 낳도록 하자고, 마치 해가 뜨면 뜨는 대로 비가 내리면 내리는 것쯤으로 여겼습니다.
옛 추억 안고 버스 타며 한강을 건너 건대입구 시장골목 데이트를 하거나, 동네 영화관에서 늦은 밤 심야영화를 보고 주말에는 출근하는 평일보다 한두시간은 더 일찍 일어나 어김없이 새벽 테니스를 함께 다니는, 작은 일상들이 모아져 한 해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신혼의 첫 해가 지나갑니다. 즐거운 시간은 예외 없이 빠르게 흘러 어느덧 두 해가 지나쳐 갔습니다.
지나간 흔적 뒷자락에 형태없는 물음 기호를 달아놓은 문장 하나가 요즘 들어 어딜 가나 따라다니네요. '이쯤 되면 보통은 임신하고 아이 낳고 그러는 거 같은데, 나는?' 하고 셀프 질문을 던져봅니다.
끊임없는 버릇처럼 운동을 지속해 왔기에 건강하다 자부했던 몸에 예상 못한 특이점이 있는 것일까 초조함까지 더해집니다. 이쯤 되면 그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단 하나로 귀결되어 갑니다. 검사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회사 동료가 추천하는 여성병원 위치를 보니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네요. 쌓인 업무로 잠시 외출을 할까하다, 눈 딱 감고 오후반차를 내기로 했습니다. 여자이기에 오는 여성병원이건만 결혼을 하였음에도 이곳은 낯설지만 합니다.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길 한 시간 넘짓, 아빠가 손수 지어주신 내 이름 석자 호명에 반갑게 응하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상황이 이어진 뒤 몇 가지 신체검사를 하기로 합니다. 진료실 입장하여 10분은 커녕 5분도 채 안된 느낌이지만 다음 예약 때 뵙자, 하십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다시 진료실을 찾았고 특별한 이상은 없다,라는 특별히 이상할 것 없는 의사 선생님의 답변을 덤덤하게 듣고 나오려는 찰나였습니다. 검고 딱딱하던 의자에서 일어나기 일보직전 '나이가 있으시니 난임병원도 한번 가보세요.'라며 하얀 가운의 그녀가 건넨 말에 소리 없이 웃고 나왔지 말입니다.
민들레 씨앗처럼 가느다란 바람에도 저 멀리 흩날릴 듯 가볍게 들은 한마디. 그 이면에는 바위산처럼 묵직하기 그지없던 선생님의 이 한마디는 다음날 또 그다음 날에도 머릿속에 남아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아이 갖는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지요.
그 뒤로 용하다는 지방의 한 한방의원을 1박 2일에 거쳐 다녀온 후 한약까지 지어 먹었음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습니다. 몇 날 며칠 아니 몇 달인가를 지나보낸 후, 흘러가는 시간시간이 아까워져 최후의 보류로 남겨두던 전문병원을 가보자 맘 먹었습니다. 차로 15분이면 도착하는 이리도 가까이에 있는 병원이건만, 이 곳까지 다다르는데 이렇게나 오래 걸렸구나 싶었습니다.
병원을 다니게 될 경우 일상의 변화 등 발생하게 될 경우의 수를 따지다보니 그 생각들로 그만 여태까지 미뤄지고 미뤄졌나 봅니다.
말로만 듣던 아니, 말로도 그닥 들어본 적 없던 난임병원을 제발로 찾아와 접수를 하고 1차 면접과도 같은 상담실로 불려 들어갔습니다. 유니폼차림의 상담매니저의 설명을 듣고 개인신상을 낱낱이 적어야 하는 페이퍼에 체크도 합니다. 브이 브이 체크를 하는 와중에 갖가지 생각이 전두엽을 휘몰아치듯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합니다. 지금의 나이를 절실히 실감하고, 여자의 삶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이냐, 하는 철학가의 사고를 잠시잠깐 떠올려봤습니다.
깊고 깊은 수면 속 인생의 의미를 찾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이어집니다. 미리 지정해둔 담당선생님의 진료실이 있는 위층으로 오르니 이 곳 대기실엔 앉을 곳 하나 남아있지 않습니다. 놀랜 토끼눈 감추지 못하고 조금 전의 잡다한 생각들이 일순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듯 합니다. 우와, 하는 짧은 외마디가 숨소리에 섞여 나오고맙니다.
차례가 되어 드디어 뵙게 된 선생님 앞. 하시는 말씀을 놓칠새라 두 귀 쫑긋 들어봅니다.
"... 아시겠지만, 아주 건강하세요. 다만 자궁 나이는 그렇지가 않네요. 결혼하고 6개월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불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그리고.... 그러니.... 그렇다면,....." 선생님의 목소리에 집중하면 할수록 흐트러진 생각들이 자석 주변 철가루마냥 한 곳으로 몰려듭니다.
경청하고픈 중저음 목소리의 선생님. 설명을 듣는 도중이지만 이미 하고픈 말과 생각이 다 모아졌기에 바로 입을 떼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그럼, 저,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고 싶은데 가능한가요?'라고요. 신속한 결정에 살짝 놀라시는 담당선생님과 신랑. 만약 난임치료를 하게 된다면 즉시 시작하자는 대화를 며칠 전 이미 마쳤지만 그게 오늘부터가 될 줄은 몰랐던 남편입니다. 시작을 미루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렵게 시간 내어 온 지금 이대로 진행시키자 싶었습니다.
결혼하면 저절로 생길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이. 그렇지만 생각만큼 수월하지만은 않었던 내 아이 갖기. 사실 그보다도 임신이 되면 내 일은 어쩐다, 커리어에 분명 영향을 미칠텐데 하는 그간의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우여곡절 속 시작된 난임치료. 간절히 갖은 마음에 서둘러 일을 마치려하고 있고 출장을 최대한 미뤄가며 그 어떤 스케줄보다도 병원가는 날짜를 꼬박꼬박 챙기고 있지 말입니다. 어쩌면 해오던 일을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려고 합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하지요. 학창시절 공부만 그러한 줄 알았는데 사십이 훌쩍넘은 지금에도 들어맞는 이야기일 줄은 몰랐습니다. 나이대에 걸맞는 그 시기라는 것, 그때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일 수도 있겠다 싶어 할 수 있는 전부를 해볼 참입니다. 일과 아이 두 마리 토끼 모두 잡고싶으나, 어쩌겠습니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내 아이. 우리아이를 그저 하루 빨리 만나고 싶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