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른여덟입니다
연애가 시작되니 남자친구와 일박 이일 여행이 가고 싶어 진다. 하고 싶으면 하고 또 가고 싶으면 가면 되는 것. 무엇이 어렵겠는가. 밀당 스타일도 아니고 에둘러 말하는 것도 더 이상 하지 않는 나이, 나는 이제 서른여덟이 되었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만난 어느 주말 저녁에 맥주집에서 치맥을 하다가 생각해 둔 말을 건넸다. 우리 어디 여행 갈래? 하고. '좋지. 어디로 갈까?' 대답하는 나의 연하남. 맥주 한 잔이 뭡니까 맥주 한 모금에 얼굴이 새빨개지는 이 사람은, 여행 가자는 말에 반응을 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알코올 흡수가 빠르기에 그러한 것인지 양 볼이 뻘겋게 달아올라있다. 홍조 띤 볼마저 너무 귀엽지 말이다.
그렇게 그날 저녁 여행을 가자, 하였고 핸드폰을 꺼내 서로의 스케줄을 확인한 뒤 그 자리에서 적당한 날짜 두어 개를 뽑아냈다. 장소는 그다음에 결정하면 된다.
신나는 마음이 들어 갑자기 맥주잔을 들어 건배! 제의를 하는 나. 그리고 그에 맞춰 건배!! 하고 받아주는 남자. 부딪히는 유리 소리가 스위스 공기처럼 청명하고 시원하다. (상상 속 스키의 나라 스위스는 나에게 그런 느낌이다)
시간이 이렇게나 빠르게 간다고? 시간이 흐르는 건 빠르고 느리고가 없음을 분명 알고 있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가 보다. 열흘이나 지났을까 싶었는데 어느새 그로부터 한 달이나 지나갔다. 말하자면 우리가 하루치 짐을 챙겨 산으로 그리고 바다로 떠날 날이 되었다는 것이다.
뭣 뭣을 챙겨가야 한담. 단 이틀인데도 일주일 출장 가는 것 못지않게 짐 챙김에 생각이 많아진다. 산에 올라갈 거니 편안한 복장이 필요하고, 콘도에서 입을 잠옷? 아냐 아냐 잠옷은 오버지. 그럼 그냥 바이올렛 파자마 바지만? 몇 해 전 엘에이 출장에서 사 온 아끼는 빅토리아시크릿 파자마도 챙기고, 화장품 파우치도 챙기고... 먹거리는 가서 장 보면 되겠고.
스몰 캐리어를 가져가야 하나 했는데, 노노노 그건 아니지. 빅 숄더백 하나에 모든 짐이 다 들어간다. 뭔가 있어 보이는 여행 가방스럽다. 만족하며 계속해 여행 물품을 챙기고 있는데 '뭐 해! 얼른 나와 밥 먹어!' 엄마의 우렁찬 목소리에 후다닥 거실로 나왔다.
"엄마. 내일 친구들하고 놀러 갔다 올 거야. 하루 자고 올 거고."
"..... 이거 맛있더라. 먹어봐. 지난주 너네 오빠가 가져온 고긴데 맛있더라."
"맛있네. 엄마 그래서 나 내일 없어."
"운전하고 가?"
"어. 그치 내 차로 갈 거야."
"운전 조심해. 사람들 데리고 다니면 더 조심하고......"
어디로, 어떤 친구들과, 무엇 때문에 가는지에 대한 물음이 일절 없다. 다만 말 뒤끝이 뭔가 할 말이 더 있어 보이는 눈치다.
무슨 말이 하고픈지 안다. 잘 안다. 알고 말로다. 더 생각할 겨를 없어지도록 '엄마, 근데 이거 무슨 고긴데 이렇게 부드럽데? 국물도 시원하니 맛이 좋네. 오빠가 서산 살다 보니 해물을 잘 아는가 봐? 단골집에서 샀나 보네.' 엄마도 더 말을 이어하진 않으신다. 휴우-
엄마가 하고팠던 말. 꿀꺽하며 삼킨 말. 눈치 없는 내가 눈치 있게 나름의 해석으로 풀어보자면, 이거다. '지금 나이가 몇인데. 친구들하고 어울려 다니고 있담. 도대체 언제 남자 만나고 결혼하고 다 할 건데. 애는 어쩔 건데. 지금 나이가 몇인데 맨날 놀기만 하냐고!' 얼마나 하고팠을 말인데, 모른 채 해주며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엄마에게 경의를 표한다. 진심이다. 참아준 엄마로 인해 나의 여행 전날 기분은 그저 룰루랄라다.
아침이 되어 "다녀올게" 한마디 남기고 현관문을 닫는데, 뒤따라 "조심하고!" 엄마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네 엄마. 저. 사실 결혼할 남자 - 결혼하고픈 남자랑 놀러 가는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기다리면 좋은 날 분명코 옵니다. 어마마마..." 차 시동을 걸며 웅얼웅얼 소리 없는 답장을 보내본다.
네비에 건대 입구를 찍는다. 매일같이 가는 길인데도 네비에 목적지를 찍고 가면 더없이 좋다. 이른 아침 한강을 건너는 기분도 끝내준다. 가방 하나 가벼이 들고 있는 한 남자가 저 멀리 보인다.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니 점점 더 웃음이 활짝이다. 나도 웃고 이 남자도 웃고, 주말 아침에 만난 즐거운 연인이지 말이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떠나볼까요!
이곳은 강원도다. 창밖으로는 설악산 울산바위가 웅장하게 보이고 바로 앞은 골프장이다. 골프장은 저녁 야경이 생각 외로 예쁘기에 숙소가 맘에 쏙 든다. 처음 와 본 회사 콘도인데 와우 너무 좋은 걸, 하는 맘에 소속된 직장이 뿌듯해지기까지 한다.
숙소는 숙소고, 강원도에 왔는데 설악산 케이블카는 꼭 타봐야지 싶었다. 산에 오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선 머리찔끈 묶고 가보자 했다. 가족여행으로나 와 봤던 설악산에 드디어 나도 남자친구랑 왔지 말이다. 나도 내 옆에 내 짝이 있었으면 하곤 했는데, 바라면 진짜 되기는 되나 보다, 싶다.
설악산에 온 것만으로 좋은데. 내 옆에 바짝 붙어있는 남자가 있고 그의 따뜻한 손도 잡고 걷다니. 늦여름이라 춥지는 않지만 잡힌 손을 빼고 싶지는 않다.
등산이 좋아 등산 동호회에 가입해 서울 주변 청계산, 관악산은 물론이고 태백산, 한라산까지 다녀봤지만 케이블카 안에서 바라보는 산들도 너무 예쁘다. 모든 게 아름답기 그지없다.
케이블에서 내려 조금 더 올라가면, 바위산 전경이 황홀할 정도로 멋지게 펼쳐져 있다. 이미 그곳을 몇 해 전 가족들과 와 본 적이 있기에 알고는 있지만, 두 번 세 번 와봐도 좋은 곳임을 인지하고 있어서 다시 왔어도 오늘이 처음 온 것만 같다.
날이 기가 막히다. 사진을 찍으면 선명하게 잘 찍힐 것 같다. 머리칼을 흩날리게 만드는 산 바람이 불지만 인증샷을 놓칠 수는 없다. 바위에 올라앉아 각자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해보고 제일 멋진 모습의 앵글로 정성 다해 찍어주고, 남자친구의 긴 팔을 이용해 투 샷 셀카도 몇 장 찍어본다. 하하 호호 웃으며 사진 찍기를 하고 있는데 중년 아저씨 한 분이 말을 걸어오신다.
"두 분 제가 한번 찍어드릴까요? 이래 봬도 전직 사진작가랍니다. 커플 사진도 많이 찍었고요."
이런 행운이! 좋고 말고요. 사진 찍기도 전에 꾸벅 감사 인사를 하며 카메라를 건넸다. 산 정상에서 만난 사진가분께서 지시하는 그대로 따라보기로 했다.
"고개는 조금 숙이고, 허리와 어깨는 펴고, 표정은 자연스럽게, 네 좋습니다. 남자분 쪽으로 살짝만 더 기울이고, 네에 좋습니다. 아. 남자분 얼굴 표정이 너무 굳었네요. 이렇게 예쁜 여자분과 함께하는데 웃으셔야죠? 네네, 좋습니다. 좋아요!"
"두 분 잘 어울리시네요. 좋은 인연 계속 이어가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남기시며 새하얀 캐논을 돌려주시고 뒤돌아 홀연히 걸어가신다. 스치는 인연임에도 정성스레 찍어주시고, 평생 간직하고픈 명언과도 같은 말씀까지 해주신 분이 아닐 수 없다.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산을 내려오는 어느덧 오후다. 속초의 명물 만석닭강정과 갖가지 먹거리를 포장해서 집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바깥 골프장 야경 불빛이 분위기를 한층 돋워주는 밤이다. 둘만의 식탁을 차리고선 짠! 스페인 모스카토 맛이 이리 좋았던가... 두런두런 얘길 하다 낼 아침 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다. 일출을 보고 싶었기에 바다로 해 뜨는 거 보러 가자 하니 새벽에? 하더니만, 그래 그러자, 좋아하고 대답한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일어났고, 겉옷만 챙긴 채 그대로 바닷가로 향했다. 새벽 일출에 살짝 늦긴 했지만 고요한 해변가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모래사장 위에 나란히 앉아 가져온 커피를 마셔본다. 어깨에 기대 파도 소리를 가만 듣는데 참 편안하다. 커피는 이미 식었지만 그래도 이 시간, 이 장소 그리고 지금의 이 감정은 언제까지고 식지 않을 것 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강하게 든다.
사진가 아저씨의 말처럼, 우리의 좋은 인연이 왠지 이대로 쭉 계속될 것만 같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