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필연으로
"너 생일이 6월 24일이야?"
대학교 OT에서 같은 방 동기들끼리 만든 네이트온 단체방에서 A가 불쑥 T에게 개인 대화를 걸었다.
T의 아이디 끝자리가 624인데서 물어본 것이었다.
"응 맞는데... 왜?"
T는 내심 개인대화를 걸어온 A가 반갑다. 사실 자신이 먼저 대화를 걸어보고 싶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그저 단체방에서 가끔 A의 대사가 나올 때마다 촉각이 곤두선 T였다. T는 OT 집결지에서 A를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이 A에게 관심이 있음을 내내 느끼고 있었다.
T와 A는 OT에서 같은 조에 배석되어 같은 버스를 탔다. 집결지에서 만나 같이 대화를 나누던 남자 동기와 제일 먼저 버스에 탑승한 T는 끝에서부터 채워앉아 달라는 인솔 선배의 말을 충실히 따라 맨 뒤 창가에 앉는다.
A는 집결지에서 살짝 친해진 현지와 함께 T를 뒤따라 들어온다. 맨 뒤에 남자 둘이 이미 앉아 있었으므로 바로 앞 좌석에 현지와 함께 앉는다. 어차피 초등학교 때부터 버스 맨 뒷자리는 남자들의 차지였으므로 모두가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T는 아까부터 A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예쁘다고는 볼 수 없지만 키가 작고 다소 귀여운 느낌의 여자아이였다.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자꾸 살짝씩 쳐다보게 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눈길은 무의식적으로 A를 향하고 있었다.
반면 A는 아직도 자신이 이 대학교에 정착하는게 맞는지 내심 혼란스러운 터라 T와 몇 번 눈이 마주쳤을 뿐 T의 존재를 의미있게 각인하지 않았다. 그냥 버스 뒷자리에 앉은 남자애일 뿐.
하지만 T는 여전히 A의 뒷통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아까는 무의식적으로 쳐다보았지만 이제는 내가 왜 이 아이에게 자꾸 눈길이 가는지 궁금해 의식적으로 A를 보며 생각하고 있다. T 바로 앞에 A가 앉아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T가 앞을 보고 있다고 여기지, A를 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OT라는 이름에 걸맞는 대학생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체면치레식의 선배들 공연이 이뤄진 뒤 본격적으로 OT, 즉 "오(O)늘 토(T)하자"라는 별칭에 맞는 술게임이 벌어졌다.
T와 A는 버스에서 가까이 앉은 탓에 같은 방에 배정되어 같은 팀이 되었다. 30명 단위로 이뤄진 조 안에서 다시 7~8명 단위 4개 팀으로 쪼개졌는데 거기서도 T와 A는 같은 울타리에 속하게 된 것이다.
술게임판이 시작되고 술게임이 당연히 처음이지만 유난히 적응이 안되는 A는 자꾸 벌칙 대상이 되어 술을 마신다. 그래서 판이 벌어진지 1시간이 좀 넘어 다소 취해버리며 누가봐도 내향적이던 모습이 격한 외향형으로 변해 더 적극적으로 술게임에 임한다. 결과는 당연히 벌칙으로 이어진다. A는 인솔하는 남자 선배 진우가 흑기사로 얼마나 대신 마셔줄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주변 친구들이 눈치껏 A를 술게임에서 잠깐 제외해 정신 차릴 시간을 주고자 했지만 취기에 신난 A는 별안간 다시 술게임에 뛰어들어 술이 꽤나 센 진우마저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인지 의식적인지 A 옆자리나 가까운 곳에 주로 앉아 함께 게임하던 T는 이런 상황을 보며 자연스레 대신 흑기사를 자처하게 된다. 어느 순간 A의 흑기사를 해주며 술을 대신 마시던 진우 선배가 술을 마시면서 미간을 심히 찌푸리는 것을 목격해 A 근처에 앉은 남자 후배로서 그걸 지나치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원래 OT에 참여한 신입생들이 동기의 흑기사를 하는 것은 선배들이 막고 있었지만, 밤이 무르익어 무리를 하는 선배들이 생기자 흑기사를 자처하는 신입생들의 패기도 하나의 재미요소가 되었다. 당찬 여자 신입생이 같은 여자동기의 흑기사를 해주는 광경, 남자끼리도 흑기사를 해주는 의리 광경들이 선배들의 회자거리가 된 가운데 T가 A를 위해 계속 흑기사 역할을 해주는 모습이 선배들의 재미있는 가십거리가 되었다.
"와~ T랑 A 잘 어울린다~!"
"사겨라! 사겨라! 사겼으면 좋겠다!"
T가 A의 흑기사를 할 때마다 선배들이 사귀라며 분위기를 몰아간다.
그렇게 T와 A는 안면을 튼 터였다. 다만 OT가 끝나고서 입학식 개강날까지 서로 볼 일도, 대화할 거리도 없었기에 A는 T를 그저 자신의 흑기사를 많이 해준, 우연히 근처에 앉은 남자아이로 기억하고 있었을 따름인데 T의 아이디 끄트머리에 적힌 '624'라는 숫자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너 생일이 6월 24일이라고???"
"응, 말도 아니고 지금 글자로 써놨잖아. 근데 그게 왜?"
"헐 대박, 나도 6월 24일이 생일이야..."
T는 그 순간 뭔가 운명이 아닌가 싶은 격한 감정 동요를 느꼈다.
자꾸 눈길이 가던 아이가 생일이 같다니, 이게 무슨 의미인가? 누가 보더라도 천생연분이 아닌가?
약 20여년 살 때까지 짝사랑으로만 가슴앓이하고 제대로 고백도 못했던 T에게 기회만 있으면 A에게 고백해 연애 한 번 해보겠다는 생각이, 그리고 그럴 용기가 생기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거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하자. 괜히 이거 알려지면 또 우리 사귀라고 주변에서 바람잡을 것 같아..."
"야 당연하지! 우리가 떠벌리고 다니지만 않으면 어차피 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 둘은 이제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T는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으나 진정된 척 그 날로 A와 많은 네이트온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T와 A는 신입생 OT에서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타고 우연히 같은 방에 배정되어 술게임을 하며 서로의 존재를 각인했고, 또 우연히 생일이 같아 그걸 계기로 친해졌다.
# 2023년 TA부부의 주석 :
하루에도 수없이 우연을 겪는다. 더 생각해보면 하루에 일어나는 일 중 우연이 아닌 것이 더 드물다. 계획된 일정에 맞추어 출근하는 길에서도 잠시 어깨를 스친 사람도 우연히 만난 사람이고, 일하다가 문득 생각난 잡다한 것들을 동료와 이야기한 것도 출근하기 전에는 의도되지 않은 우연적인 사건이다. 돌아보면 그렇다. 우리의 삶 한걸음 한걸음은 실상 맞딱뜨리기 전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당신을 만나려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당신을 만나버렸다. 심지어 태어나려고 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태어나버렸다. 그런데 그 모든 사건과 사람이 나를 만든다. 그렇게 보면 모든 우연이 필연 같기도 하다. 꼭 태어났어야만해서 태어났고 당신을 만났어야만 해서 만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걸 필연이라 해버린다면 우리는 그냥 운명의 쳇바퀴에서 살아가는 다람쥐와 다름 없다.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살고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필연을 지정하는 것도 같다. 우연의 바다 속에서 우리가 진정 중요하고 의미있게 생각하는 것을 콕집어 그것만큼은 필연이라 생각하고 사는 것이다. 무심코 지나갈 수 있던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평소와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한다.
이렇게 쓰고보니 사랑과 비슷해보인다. 그냥 태어났을 뿐인 나에게 의미를 부여해 나를 어제와 다른 나로 계속 갱신해 나를 사랑하는 것, 또 그냥 마주쳤을 뿐인 당신에게 의미를 부여해 그 전과 다른 사람, 다른 관계가 되어 우리를 만들어 가는 것. 어쩌면 나와 나 사이에 또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우연한 많은 것들을 우리만의 필연으로 만들어가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삶에 의미가 넘치도록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사랑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