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우니까 아름다운 것
2023년은 T와 A가 연애를 시작한 지 15년이 지났고 결혼한 지 5년이 지난 해이다.
T와 A가 처음 만난 건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집결지였지만 연애를 시작한 건 2008년 3월 4일부터였다. 신입생 입학과 08년도 1학기 개강이 3월 3일이었고, 그날은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2008년 2월 말의 어느 날 서로의 생일이 같음을 확인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날이었다.'
그들의 성급한 연애는 나름 사정이 있다. 그것은 많고 긴 짝사랑 경험에도 고백 한 번 못해본 T에게 원인이 있다. T는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여자아이 지애를 짝사랑했었다. 물론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보습학원에서 마주친 어느 예쁜 다른 아이를 또 짝사랑하기도 했지만, 지애가 T가 다니는 학원으로 와서 마주치자 다시 지애를 짝사랑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T는 누구를 좋아하든 고백을 못해본 것이 한이었다. 그래서 '연애는 좋은 대학에 가면 자연스레 하게 된다.'라는 어른들의 격언을 나름 좋은 대학에 입학한 김에 반드시 실천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와 중 A가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사실 A에게 고백한 것도 T의 주도적인 행동과 계획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3월 4일 오후 4시경, 6시부터 예정된 학과 개강파티를 앞두고 공강을 맞이한 신입생들이 어디에서 시간을 보낼지 몰라 OT 때 같은 방을 썼던 동기들끼리 서로 연락을 주고받던 터였다.
T와 A도 마찬가지였다. T는 공강을 맞이하자 제일 먼저 A에게 문자를 했다. 생일이 같다는 촉매가 누가 먼저 연락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관계는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디서 뭐 하냐? 시간 애매하지 않냐.'
T는 A에 대한 이성적 관심을 가급적 숨기는 말투로 문자를 보냈다.
A는 때마침 OT 때 친해진 희경언니에게 어디냐고 연락을 하던 차였고, 희경언니도 또한 OT에서 친분을 쌓은 산웅에게 사람들을 모아 시간을 때워보자고 연락을 하던 차였다. T와 A, 산웅과 희경은 모두 같은 방에서 술게임을 했던 동지들이었다.
그렇게 네 명의 긴급회동이 이뤄졌다. 장소는 학교 정문 근처 허름한 떡볶이 집이었다. 1층에 여느 분식집처럼 넓은 철판에 떡볶이와 어묵들이 즐비하고 2층에 식탁과 좌석들이 놓여 있는 집이었다. 3천 원에 떡볶이와 튀김 범벅을 먹으며 4명이 수다를 떨 수 있었기 때문에 돈이 궁한 신입생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재수를 해서 4명 중에 가장 연장자인 희경이 떡볶이를 사기로 했다.
2층에 올라가 보니 사람이 아무도 없어 4명이 덩그러니 앉았다. 떡볶이를 가지고 올라와 먹어보니 2층에 사람이 없는 이유는 명백했다. 그다지 맛이 없었다. 하지만 4명은 맛있는 떡볶이를 먹으러 온 것이 아니고 그저 시간을 때울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었기에 이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수다를 떨 수 있었기에 그들은 간혹 떡볶이와 소스가 묻은 튀김을 씹으며 주제가 딱히 없이 처음 서로를 알아가기에 나름 재미가 있는 시답잖은 대화들로 시간을 때워갔다.
그런 와중 갑자기 희경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산웅아 나 편의점에서 뭐 살 거 생겼는데 같이 가줄래? A야 T야 나 잠깐 갔다 올게"
산웅과 희경이 나가고 갑자기 T와 A가 덩그러니 남았다.
갑자기 고요해진 맛없는 떡볶이 집 2층이었다. 4명이서 대화를 나누다가 외향적인 성격으로 사실상 대화를 주도하던 희경이 사라지니 적막이 흐르고 둘의 떡볶이 씹는 소리만 잔잔하게 흐른다.
T는 갑자기 거기서 자신의 심장소리를 듣는다. A는 들을 수 없지만 T 본인은 명료하게 들을 수 있는 빠르고 강렬한 요동침이었다.
어제와 오늘도 A와 T는 지나가는 선배들로부터 간혹 놀림을 받던 차였다.
"A야 T는 어딨어? 내일 개파(개강파티)에서는 흑기사 안 해준데?"
"T야 오늘도 A 흑기사 해줄 거야?"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인지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어색함은 마치 냄새라도 있는 것 마냥 둘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적막을 깬 것은 T였다.
"너... 선배들이 우리 서로 잘되라고, 사귀어 보라고 놀리는 거 싫어?"
"... 왜...? 넌 싫어?"
"내가 물어봤잖아."
갑자기 또 적막해진다. T는 사실 희경누나가 나가자마자 직감했다. 이것이 자신의 바보 같은 짝사랑의 역사를 깰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하지만 고백을 해본 적이 없으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방금은 괜히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가 A의 말문을 막아버린 터였다.
이대로 가면, 아니 이 기회를 놓치면 또다시 짝사랑 역사에 한 개를 추가하는 일이 될 것이 T 생각에는 자명해 보였다. 그런데 싫다고 딱 자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다시 자신에게 넘기는 A도 자신이 싫지는 않아 보였다. 지금이 진짜 기회라는 생각이 드는 T였다.
사실 T는 중고등학교 때 짝사랑 했던 것만큼 A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수도 없었던 게 생각만 해도 온몸이 찌릿했던 앞서 두 여자아이는 긴 시간 지켜보다가 어느새 머리와 가슴속에 자리 잡은 아이들이었다. 반면 A는 이제 처음 안 지 2주 남짓되었고 그마저도 실제로 얼굴을 본 것은 오늘이 두 번째였다. 하지만 T에게 그런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다. T에게는 좋은 대학에 가면 연애를 할 수 있다는 어른들의 전언을 현실화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이를 한 번 악물고 T는 다시 입을 뗀다.
"사실 나 너에게 OT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이대로 가다가 내가 나중에 너한테 고백하거나 진짜 잘되는 일이 만약에 생긴다면, 그건 선배들이 밀어줘서 얼떨결에 그리 된 것 같을 거 아냐? 또 생일도 같으니까 괜히 그런 게 알려져서 주변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또 분위기 때문에 얼떨결에 사귀는 것 같을 거고... 또 그렇게 고백을 하면 너도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든 괜히 분위기 때문에 사귀는 것 같아서 싫거나 마음이 있어도 거절할 거 아냐?"
"..."
고백을 하면서 반문을 하는 멍청한 남자가 또 있을까 싶지만 고백이 처음인 T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다음에 올 메시지는 명백해 보였다. A도 서서히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설픈 T의 고백 서두에 실망하고 말 것도 없이 자신도 그 메시지에 말려들어가기 시작한다. 맞는 이야기다. 대학에 와서 연애는 해봐야 하는데 자신도 분위기에 휩쓸려 가는 것은 싫다. 하지만 토론인지 고백인지도 모를 저 T의 반문에 대답하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A는 침묵으로 동의를 대신하는 듯했다. 그 침묵이 동의인지 아니면 그저 침묵인지는 A도 지금 스스로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오늘부터 한 번 사귀어 볼래?"
"..."
드디어 나올 말이 나왔다. 이번엔 침묵으로 대답되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A 입장에서는 갑자기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 '나는 아직 T를 잘 모르는데 이게 맞나? 그런데 T가 외모도 그다지 나쁘지 않고 싫지는 않은데 그냥 오케이 할까? 아닌가? 너무 성급한가? 대학에 왔으니 이런 기회가 더 많지 않을까?' 수많은 긍정과 부정을 오가는 문장들이 A의 머리를 지나간다.
한 10초가 지났을까, T는 그 10초가 10분, 아니 10시간 같다. 처음 하는 고백인데 침묵이 이어지니 몇 초라도 미칠 지경이다. 초조하다. 이대로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줬다가는 '한 번 생각해 보고 이야기해 줄게'같은 말이 나올 것만 같다. 그러면 끝이다. 자신은 다시 고백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확신한다. 안달이 난 T는 갑자기 다리를 떨기 시작한다. 떡볶이 집에서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T는 다리를 떤 지 1초 만에 자신이 다리를 떨고 있음을 느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아 사귈 거야 말 거야!"
뭔가 멋진 말로 한 번 더 그녀에게 어필하고 싶은데 말이 이 따위로 나와버린 것에 T는 말을 뱉자마자 흠칫 놀란다. 저게 사실 본심이긴 하다. 기껏 20년을 아껴와서 처음 한 고백인데 대답이 침묵이라니, 참기 힘들어서 화가 날 지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아! 사귀어, 사귀어!"
깜짝 놀란 A가 어깨를 들썩이면서 말한다. 깜짝 놀란 자신의 감탄사 아! 에 자기가 놀란 A도 사실 자신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아까 T는 얼떨결에 사귀는 것이 싫어서 고백했다는데 정말로 얼떨결에 사귀게 되어버린 것이다.
자, 이제 사귀게 되었으니 뭘 해야 할까. 당연히 둘은 알 리가 없고 적당한 적막이 흐르다 어느새 개강파티에 갈 시간이 되어 자연스레 같이 길을 나선다. A는 일어서며 말한다.
"야, 그래도 우리 당분간 사귀는 건 비밀로 하자."
"그래. 그러면 네가 먼저 가. 나는 주변 한 바퀴 돌고 좀 있다가 갈게."
맞는 말이다. 개강 다음날부터 사귄다는 소문이 바로 돌게 되면 신입생 커뮤니티와 OT를 인솔한 선배들 커뮤니티의 중심 화젯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T에게는 첫사랑이자, A는 중학교 때 같은 반 남자아이를 사귀어 본 것은 사실 장난이며 진짜 첫사랑은 이 날부터라고 말할 둘의 사랑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떡볶이 집은 훗날 그들이 결혼도 하기 전에 반쯤 허물려 잡화점이 되어버린다. 아마도 건물 일부가 다른 사람이 주인인 도로를 침범한 불법 건축물이었나 보다. 건물을 헐리고 그들의 기억만 남았다.
2023년 T의 주석:
모든 게 아쉽다. 이렇게 결혼까지 할 줄 알았으면 떡볶이 집에서 고백하지도, 고백 대사를 저렇게 엉망으로 하지도 않았을 것 같다. 아니, 아예 저 때 고백을 해서 첫사랑과 결혼한 것도 사실 아쉽다. 모든 이성과의 연애 경험이 A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나라고 호기심과 다른 여자를 만나고픈 욕망이 없을까.
하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개강날 분위기 좋은 곳으로 불러 더 일찍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연애할 때 더 성숙한 모습으로 당신을 더 사랑해 줄 것이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마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둘이서 먹는 떡볶이가 다시는 그토록 따뜻하지 않을 것이다. 멍청한 고백의 날을 가끔 상기하며 서로 웃는 것을 못할 수도 있다(매년의 기념일마다 매번 꺼내는 기억인데 왜 그때마다 웃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누구를 사랑하든 자기 스스로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만 누군가를 또 사랑할 수 있다. 이 두 문장은 아마 다른 글에서도 반복에서 종종 등장할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어느정도냐 하면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한가,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사랑하는 것.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스스로를 사랑해 나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이 후회와 아쉬움을 구분하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후회는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지른 것이고 아쉬움은 부족하기 짝이 없으나 당시 맥락에서는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후회는 반성과 자신에 대한 용서를 통해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갈 일이고 아쉬움은 완벽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고 아쉬운대로 남겨둬야 할 기억이다. 후회를 정당화하지 않고 딛고 일어서느냐가 자기를 감싸고 도는 방종과 사랑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게 하고, 아쉬움을 없는 일인 것처럼 외면하지 않고 아쉬운 대로 온전히 간직하느냐가 나르시시즘과 진정한 사랑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 아쉬움은 그저 아쉬움 그대로 간직하고 아끼자. 그 아쉬운 기억으로 인해 언 땅이 녹지 않은 3월 초도 우리부부에게는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