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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니아빠 Oct 12. 2023

말은 쉽지만 하기는 어려운 공감

함부로 말하는 공감과 진짜 공감의 차이

"아반떼도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차야. 너 정말 개념 없는 거야."


T와 A가 큰 맘먹고 들어간 2008년 5월 학교 앞 스타벅스에서 분위기가 깨지는 한 마디였다.

대학 생활 모든 것이 처음인 그들에게 중간고사가 끝난 잠시의 해방은 달콤하기만 했다. 시험기간 아껴진 용돈으로 한 껏 마음이 두둑해진 그들은 밥보다 비싼 커피를 팔기로 소문난 스타벅스 카페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한다. 학교 정문 근처 대로변이라 위치상으로는 가까웠지만 학교 식당 비빔밥 메뉴가 3천원인 마당에 카페라떼가 4천 원에 가까운 스타벅스는 대학생들에겐 커플들이 큰맘 먹고서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언제든 밥 사달라고 연락하라 멋있는 척해놓고 막상 친해지고자 밥 사달라 연락하니 예의가 없다며 꼰대질 하던 선배 뒷담화, 조별 과제에서 친해진 사람들에 대한 다른 이야기 등 좋은 음악과 그들 나름대로는 꽤나 근사한 분위기 속에서 호의적인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창가에 앉은 그들에게 신호등 앞에 서있는 BMW 세단 한 대가 눈에 띄었다. T가 나고 자랐던 수원에서는 하루에 1대도 마주치기 어려운 고급차였다.


"와.. 저런 외제차를 타려면 얼마나 돈이 많아야 할까? 수원에서는 거의 보기 힘들어. 그런데 역시 서울에서는 가끔 보게 되네." 

"그러게... 돈이 많아도 굳이 저렇게 비싼 외제차를 사야 할까 모르겠어."

"맞아, 그냥 아이 둘 키우는 집도 아반떼면 충분한데."

"에이... 아반떼는 좀 그렇다 소나타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냐, 그럼 경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뭐가 돼? 난 좋은 차의 예로 아반떼를 든 거야."


좋은 대화 분위기에 갑자기 균열이 갔다. A는 중학교 이후 친구들 가족이 아반떼를 타고 다니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아반떼가 딱히 나쁜 차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자기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갖춘 삶'은 소나타부터였다. 

T 역시 자기 집 차는 탄 지 5년 넘은 미니밴이다. 하지만 T가 중학교 때부터 그 미니밴을 타기까지 T네 집은 10년 넘게 '엑셀'이라는 작은 차를 타고 다녔다. 엑셀에 비하면 2008년 현재 아반떼는 충분히 좋은 차 그 이상이었다. 그런데 그가 사는 동네에서는 '엑셀'도 이름에 걸맞게 꽤 괜찮은 차였다. 주변에는 경차도 즐비했기에 엑셀은 괜찮은 차였고, 소나타는 정말로 좋은 차에 속했던 것이다. 


둘의 다른 상황은 곧바로 갈등으로 이어졌다. 생각을 바꿀 것을 요구하는 T와 생각이 바뀌지 않는 A의 미묘한 갈등이 대화 내내 이어졌다. T는 알 수 없는 불쾌감에 A가 생각을 바꾸길 원했고, A는 그냥 자기가 살아왔던 세상의 기준대로 느껴졌던 자신의 취향일 뿐이었으므로 T의 요구대로 생각을 바꾸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갑자기 좋은 대화 분위기가 끊긴 이 상황이 불쾌할 따름이었다.


그런 긴장 끝에 이제 스타벅스를 나갈 시간이 되자 T가 '개념 없다'라는 표현을 써버린 것이다. A는 곧장 사과를 요구했으나 T 역시 차에 관한 대화 내내 자신을 감쌌던 불쾌감에 그럴 마음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찜찜한 상태로 서로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T는 점점 마음속 깊이 좋아지는 A에게 왜 '개념 없음'이라는 단어까지 쓸 정도로 기분이 나빴는지 그 출처가 궁금했다. 뭔가 A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미안하지 않기도 했다. 그 기분 나쁨은 뭐였을까, 그것만 안다면 이 갈등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단어 자체가 너무도 곱지 않았기에 이대로 간다면 연애를 시작한 지 백일도 되지 않아 관계가 끝날 것만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아 새벽까지 고민을 이어가던 차 한 단어가 떠오른다.


'모욕감'


T는 마침내 그 모든 걸 요약할 단어를 찾았다. T는 마치 A의 잣대가 마치 A 밑에 있는 계층, 자신까지도 모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엑셀을 10년 타고 다니는 동안은 자신은 최소한도 되지 않는 삶이었던 것처럼, 마치 A가 자신의 과거를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낀 것 같았다. 최소한 그때의 기분 나쁨을 설명할 단어는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고, 그 외에는 자신이 기분 나쁠 이유도 없는 대화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둘은 어차피 같이 가입한 동아리 방에서 한 번쯤은 만날 터였다. 어차피 만나게 될 것을 서로 알았기에 서늘하게 끝난 대화를 두고 헤어진 다음날 T는 A에게 비교적 어색하지 않게 휴대폰 문자를 보낼 수 있었다.


'나 곧 숙대입구역...'

명동역 근처에서 여성 전용 기숙사에 기거하는 A와 아침에 만나 학교 등교를 하는 T가 A에게 매일 보내는 문구였다. T가 삼각지 역을 지나 숙대입국 역을 향하고 있을 때쯤 A가 짐을 챙겨 나와 명동역 플랫폼으로 들어오면 딱 T가 탄 열차를 탈 수 있기에 생긴 루틴과도 같은 것이었다. 다만 평소에는 하트와 같이 낯 간지러운 모양이나 문구로 마무리하던 문자를 '...'으로 마친 것이 평소와 다른 점이었다.


A가 명동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T를 만났다. 둘 모두 점심 전까지 공강이었기에 학교 중앙 도서관을 가거나 캠퍼스를 같이 거닐며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T는 사과했다. A에게 모욕감을 느꼈을 뿐 A가 자신을 대놓고 모욕한 적은 없으니 T는 비로소 자신의 잘못했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 다만 사과해야 할 일을 만든 잘못된 언어 사용의 맥락은 A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자신이 아반떼보다 좁고 오래된 차를 타고 유년기를 보냈던 일과 소나타를 최소한으로 설정했을 때 본의 아니게 모욕당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혹시나 정말 먼 미래겠지만 결혼까지 생각해서 A가 자신에게 소나타를 최소한으로 제시하면 어쩌지 하는 부담이 자신도 모르게 생긴 것 같다며, 만난 지 100일도 안되어 당신과 영원을 생각하는 것까지 지레 마음속에서 피어오를 정도로 네가 좋아진 것 같다며 A에 대한 추가적인 고백까지 곁들였다.


A는 그제야 모든 것을 납득했다. 모욕할 의도는 없었다. 친구들의 최소한이 소나타였기에 나의 최소한도 소나타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 자체가, 혹은 그런 생각을 친절한 말투로라도 내뱉는 자체가 누군가에 대해 기분 나쁜 모욕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혹여나 BMW를 최소한의 갖춘 삶으로 누군가가 이야기한다면 BMW까지는 사서 타보지 못한 우리 아빠와 우리 식구들이 못 갖춘 삶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던 T가 잘못했고 그것으로 인해 사과를 요구했던 자신도 역시 마땅한 요구를 한 것이나 그 모든 것을 T가 시인하고 사과했기에 A는 이제 T가 살아온 이야기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또 T가 마지막에 말했던 고백도 마음에 들었다. 아직 결혼은 멀긴 하지만 자신과 평생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는 T의 고백은 그저 달콤했다.



2023년 A의 주석:

요즘 많은 매체들을 보면 간혹 여자를 다루는 법에 대해 공감을 이야기하곤 한다. 보통 이런 식이다.

여자들은 그냥 공감만 해주면 된다며, 여자가 대화 마무리에 이야기하는 어미를 그대로 따라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자가 기분 나빴다고 이야기 하면 "아 기분이 나빴구나~" 라고 말하고 속상했다고 이야기하면 "아 속상했구나~"라고만 이야기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상대방의 말을 듣고 되뇌어 주는 '기술'을 공감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틀린 말이다. 그건 자신의 감정에 대한 해석 자체가 불가능한 아기들에게나 해주는 일종의 '육아의 기술'이다. 

공감 '하는 것'과 공감을 '해주는 것'은 다르다. 여자들은 평생 철 못 들고 살아가는 아기나 애완동물이 아니다. 심지어는 공감을 해주더라도 그걸 그냥 상대방 기분상태나 반복해주는 게 아니다. 아기들에게 공감해주기라는 개념을 사회에 널리 알려주신 오은영 박사님의 책들을 실제로 읽어보면 아기는 자신의 감정표현이 서툴러 어른의 관점으로 그걸 함부로 판단하면 안되기에 아기의 감정상태를 있는 그대로 짚어보고 그에 맞게 말해주는 것, 요컨대 아기의 눈높이에서 함께 고민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공감해주기의 실제 의미다. 


 사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아이에게 공감해주기를 해주더라도 말한 맥락에서 아이에게 필요한 진짜를 찾아내 그 필요한 것을 해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친구를 때리고 나서 자신이 친구에게 너무 속상해서 그랬다고 하면 "속상했구나~"하고 해주더라도 "그런데 속상하다고 때리는 것은 나쁜 일이야. 다음부터는 속상한 일이 있으면 어른들에게 이야기해야해. 절대 친구를 때려서는 안돼"하고 필요한 것을 해줘야 한다. "속생했구나~"에서 끝나면 그것은 공감이 아니고 그저 아이를 달래는 기술에 불과하다. 하지만 친구를 때리는 것이 명백히 나쁨에도 그것을 그냥 속상함만 달래주면서 방치하는 것은 그 아이를 전혀 공감하지 않은 것과 같다. 무엇이 그 아이를 위해 진짜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는 것까지가, 그것까지 이루어져야 바로 진짜 공감이다. 그리고 그런 공감을 진짜로 잘하려면 부모 스스로가 올바른 성인으로 거듭나려 부단히 노력해야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내게 공감은 그냥 상대방의 기분상태를 보고 눈치나 보며 행동하고 말하는 관계맺기의 기술 따위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나름 열심히 살아가면서 느낀 공감의 의미는 감성과 이성을 총동원해 그 사람의 입장과 맥락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그 사람에게 어떻게 말해주고 대해줘야 할 지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다. 때로는 그 사람과 인연을 끊는 한이 있어도 할 말은 해주는게 좋다. 어떤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옆에 있어주는 것이 좋다. 또 어떤 때는 잠시 혼자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때문에 진정한 공감은 인간에게 몹시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공감이라는 것을 참 쉽게 말하는 것 같다. 아기 취급과 공감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T는 연인에게 개념 없다는 개념 없는 말을 뱉어놓고 집에 가서는 자기 자신에게 공감한 다음 A에게 공감했다. 그리고 다음 날  A는 다시 T에게 공감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누군가를 아기취급 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한참의 생각과 한참의 대화, 한참의 느낌이 필요했다.


 우리의 공감 여정은 이 날부터가 어쩌면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2023년 현재, 4년전 내가 임신하면서 T가 장만했던 우리 가족 첫 차는 참 공교롭게도 아반떼다. 나는 이 소중한 첫 차와 함께한 우리 가족의 여정과 추억에 감사하고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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