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시작은 불안, 끝은 사랑.
누구보다 나에게 읽히고 싶은 이야기, 그래서 세상에 필요한 것 같기도
지금까지 '모두를 위한 주례사'라는 대제목으로 써온 글은 내가 육아휴직을 결정하면서 계획하고 육아휴직 이후 본격적으로 쓴 글들이다. 다만 시작할 때의 마음과 지금 이렇게 마무리할 때의 마음이 완전히 다르다. 이제와 돌아보건대 처음에는 불안에 가득 찬 마음에서 글쓰기를 계획했던 것 같다. 불안의 종류와 원인은 다양했다. 육아휴직을 결정하면서 뭔가 이 시간을 잘 보내야만 한다는 강박과 불안, 육아휴직을 했다고 정말로 육아만 했다간 가장으로서 왠지 안될 것만 같은 불안, 아이를 낳은 이후 점점 희미해져 가는 나와 와이프의 소중한 연애 기억을 어떻게든 기록해야 한다는 불안 등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불안은 내 분수에 비해 내가 과도하게 행복하다는 불안이었다.
와이프를 만나기 전의 나는, 그러니까 성인이 되기 전의 나는 온통 세상과 사람을 미워하기만 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비겁함과 혼자서만 잘살겠다는 천박함으로 가득 찼던 내가 어쩌다 운 좋게 지금의 와이프를 첫사랑으로 만나 그녀 마음에 때로 꽤나 상처를 남겼음에도 셀 수 없이 아름다운 추억의 길을 걸어 결혼까지 했다. 나도 내 나름의 개과천선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했지만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애당초 시작조차 못했을 일들이었다. 악업이 가득한 자가 누군가는 일생에서 단 한 번도 겪지 못하는 기회를 얻은 것도 과분했고 꽤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더 과분했다. 그런데 어디 그뿐인가. 내가 천사 같은 아기를 낳아 이 작고 순수한 존재에게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모든 것이 과분하다는 생각은 감사함의 임계점을 넘는 어느 순간 불현듯 불안으로 엄습했다. 세상은 불행하다는 말 투성인데 나만 이토록 행복하다니. 인과응보라는 격언이 맞다면 언젠가는 과분함의 대가를 치를 것만 같았다. 잃을 것이 늘어나고 늘어난 잃을 것의 의미는 점점 커졌다. 내 신체 일부와도 맞바꿀 수 있다가,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다가, 없는 것을 상상만 해도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것들을 잃게 되는 결말로 치달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떠밀려 글을 썼다. 내 행복과 나름의 풍족함을 어떻게든 불행으로 오염된 이 땅에 백신처럼 보급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싸이월드나 SNS에 일기를 쓸 때에는 기다란 개똥철학도 일필휘지 쓰던 나는 사라져 버렸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어려웠고 두려웠다. 누구도 나의 마감기일을 정해주지 않았음에도 마치 마감이 있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썼다.
그 모든 불안은 질환이었다. 내 불안의 대상이 실재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내가 불안한 상태였기에 불안의 대상을 찾아다닌 것이었다. 원래 세상 모든 것은 불안한 것이다. 벼락을 맞을 확률은 수십만 분의 1이지만 누군가는 그 1이 된다. 하지만 그 1이 될까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며 사는 것은 질환이다. 내 모든 불안이 그저 병임을 인정하며 약물과 주치의 선생님의 조언, 또 정신의학 관련 책에서 소개하는 여러 조언들의 도움을 받다 보니 이제야 세상이 또렷이 보였다. 이미 알고 있던 세상이긴 했다. 그 어떤 행운과 불행도 의미는 없다. 누구나 어떤 방식으로든 행운과 불행을 복불복으로 맞이한다. 악인도 행운을 맞이하고 현자도 불행을 맞이한다. 그저 인간은 그 모든 행운과 불행을 당면해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뿐이다. 오늘 밤을 자는 순간 오늘은 사라지고 내일이 나타나 오늘이 된다. 그렇다. 인간은 그저 오늘을 살아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인간이기도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저 나는 내가 만든 안개에 휩싸여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뿐이다.
과거로부터 닥친 불안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나니 진짜 세상이 나타났다. 잃을 수도 있는, 잃으면 절대 안 되는, 잃게 된다면 온몸을 도려내는 것보다 아플 불안의 대상이 아닌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 와이프와 내 아들이 모두 그들만의 세상이자 나의 세상이었다. 나의 불안은 나로 하여금 두 개의 크나큰 세상을 내 작은 눈앞의 세상에 가두었던 것이다.
집안일이나 똑바로 하고, 메니에르 병이니 역류성 식도염이니 스스로 자초한 직업병이 덕지덕지 묻은 몸을 회복시키고, 아이 등하원 잘 챙기고 잘 놀아주다가 복직하면 또 열심히 일하면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좋은 남편, 아빠가 되면 될 일이었다. 그것은 두 개의 세상을 지탱해 준다는 의미에서 내 작은 불안의 세상만 들여다보고 안절부절못하는 것보다는 훨씬 크고 무거운 일이겠으나 나의 몸과 마음을 가볍게 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진실되게 나는 선언할 수 있다.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당신들을 사랑한다.
쓸만큼 다쓰고 돌아보니 그간 행복과 사랑을 논하는 나의 글들이 몇 개는 다소 어색하지 않았을까 싶어 하나하나 천천히 돌아보았다. 만약 어색한 글이 있다면 그 글을 쓸 때의 내가 고백하는 사랑과 사랑의 행복이 진실하지 않았던 까닭일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고칠 것이 많지는 않았다. 사랑이라는 게 자식에 대한 사랑이든 연인에 대한 사랑이든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든, 또 그 사랑 안에 자리잡은 마음이 불안이든 평안이든 사실 본질은 통하는 것이 많은 까닭일 것이다. 다시 읽어보니 이 글들을 가장 소개해주며 권하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모두를 위한 주례사'라며 모두를 위한답시고 쓴 글들을 그저 글을 쓴 본인이나 저버리지 않고 실천하고 지켜나갔으면 하는 소망만이 남았다. 그렇게 보면 세상에 필요한 글이다. 적어도 하나의 세상으로서의 나는 이 글들을 필요로 하니까.
따라서 이제는 인과응보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어떻게든 내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과분한 은혜를 세상에 환원해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다만 계속 세상에 필요한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 내가 연애 10년, 그리고 결혼 6년을 지나면서 지난 16년간 계속 사랑을 배우고 실험하고 오늘도 공부하고 있지만 사랑에 대한 내 생각은 온전히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나의 글들은 과거의 현자들을 표절하고 표절한 중복 표절과 내 사랑에 대한 시행착오가 지저분하게 묻은 경험들의 집합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책을 만들 것을 생각하면서 쓴 글들에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남의 생각과 글이 실려있을까 봐 한 문장을 쓰기도 때로는 버겁고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그렇게 지운 문장들을 통해 과제를 남겨둔다. 나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명확하게 내리지 않고 사랑에 대한 글을 썼다. 하지만 내 맘 속에는 사랑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있다. "최선의 관계"가 내게 있어 사랑의 정의다. 이 정의는 영원히 불완전한 인간의 존재와 더불어 모순을 낳는다. 불완전한 인간에게 '최선의' 관계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코 다다를 수 없으니 포기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최선을 다하라는 것인지 저 정의로는 알 수가 없다. 보통 한 단어를 정의한다는 것은 그 정의만으로 그 단어의 실체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 = 최선의 관계' 이렇게만 끝내면 도대체 뭘 어쩌란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때문에 이것은 사랑에 대한 진정한 정의라기보다는 사랑의 의미를 정제한 내 나름의 고백과도 같다. 그래서 그 사랑을 더 정교하고 진실하게 설명하는 과제가 나에게 남았다.
또 사랑에 빠진 인간은 종교에 빠진 인간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사랑에 대해 가장 몰입하며 공부했을 때 나는 신학과 종교학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사제가 될지 고민하기도 했다. 지금 와이프인 당시 여자친구가 내 군대를 맞아 멀리 교환학생을 떠나자 군대 휴가를 수도원과 템플스테이에서 보내기도 했을 정도로 진지했다. 하지만 결국 종교인의 길은 포기했다. 돌아온 여자친구와 결혼하려면 선택할 수 없는 진로였으니까. 사실 대한민국에서 종교는 정말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다. 그래서 부부의 사랑에 관해 불경과 성경을 인용해 쓴 글도 있지만 지웠다. 한 편의 글로 쓰기에는 내 글 솜씨가 형편없거나 그 자체가 너무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그 외에도 행복이 도대체 무엇인지, 삶은 도대체 무엇인지도 쓰고 싶다. 적어도 사랑하면 행복해지고 사랑은 어떻게 보면 삶을 아름답게 살려는 노력을 말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다시금 열심히 공부해 다음에는 그들을 마음껏 인용하며 사랑, 종교, 행복, 존재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저 주제들에 대한 내 스승 목록에는 예수 같은 종교적 위인이나 비트겐슈타인, 소크라테스, 레비나스, 에리히 프롬 같은 철학자도 있고 애덤 스미스, 아마티아 센, 리처드 이스털린 같은 경제학자도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오늘도 사랑을 공부하지만 감히 이 분들을 직접 언급해 쓰기에는 내 공부가 모자람도 느낀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지난 글들이 한 편으로는 또 어딘가에 내놓기 모자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 만약 부족한 점이 있다면 다음의 과제로 남겨둔다는 것을 나에게 말해둔다.
또 하나의 과제는 지금 쓰고 있는 또 다른 글들에 관한 것이다. 결혼이든 비혼이든 사랑만 갖고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세상의 생각이 해가 갈수록 납득이 되지 않아 '사랑만이 결혼의 현실이다.'아니, '사랑만이 삶의 현실이다!"라는 생각으로 모든 글을 쓰긴 했지만 최소한의 덧셈 뺄셈은 알아야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것처럼 최소한 알아야 할 지식들이 있다. 그런데 그 지식을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나라가 가르쳐주지 않는 현실에 내심 불편하다가 도저히 못 참고 또 다른 글들을 쓰고 있다. 나는 한 은행에서 전세와 관련된 정부지원 대출 사업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으며 수많은 전세사기를 보고 육아휴직 전까지는 조금이라도 전세사기를 막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했다. 공교육에서 조금이라도 다루어주면 거의 모두 없앨 수 있는 피해지만 그렇지 못해 오늘도 피해를 예비한 계약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또 부자 되기에 혈안 되어 빈곤을 막는 첫 단추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무분별한 텍스트들과 그를 따르는 무모한 시도가 빈곤을 예비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현실들을 생각하며 엄밀히 따진다면 사랑만이 현실이라는 생각과 세상을 살아가는 최소한의 지식이 합쳐져야 보편타당하게 비로소 사랑만 갖고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 진리라 할 것이다. 그래서 '모두를 위한 생존 경제지식'을 표방한 그 글들이야말로 끊임없이 정진해 세상에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조급해하지 않고 내 아들에게 읽힌다는 생각으로 쓸 생각이다. 내 아들은 아직 글도 모르니 시간은 남았고 만전을 기해 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글과 사랑만이 삶의 현실이라 외치는 모든 글들을 사랑하는 나와 와이프에게 바친다. 마지막 글을 쓰는 2024년 3월 4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또 사랑하는 나에게 외친다. 제발 여기에 쓴 대로만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