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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니아빠 Jan 08. 2024

행복하게 사랑하는 삶이 갓생입니다

갓생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갓생을 막는 세상의 장벽들

 요즘 갓생이라는 단어가 돌아다니고 있다. 신을 영어로 한 God(갓)과 인생의 합성어로서 직역하면 신과 같은 삶이다. 과연 어떤 삶이길래 무려 신의 삶이라고 하는지 찾아보니 부지런하고 생산적으로 사는 삶이라고 나온다. 그런 삶이 어떤 맥락에서 무려 신의 삶이라고 이름 붙여졌는지 모르겠지만, 동의할 수 없다. 부지런하고 생산적으로 사는 것은 좋은 삶이다. 나도 고등학교 이후 지금 육아휴직 전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문제는 그렇게만 살아왔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를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일을 하거나, 산에 가거나. 와이프와 연애하면서도 가끔의 데이트를 제외하고는 같이 등산을 하며 신체를 단련하거나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뇌를 단련했다. 오죽하면 둘이서 가장 많이 먹은 음료를 꼽으라면 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벤치에서 나눠먹던 캔커피일 정도다. 그렇게 살아온 것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20대에는 그렇게 자기 존재의 도약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삶을 한 번쯤 살아봐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마냥 좋은 삶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대학 시절에 경제학회 생활을 할 때에는 1주일에 10시간 남짓 자며 학회원들이 쓴 논문을 읽고 참고문헌까지 검토하다 메니에르 병이라는 것에 걸려 이명과 난청, 어지럼증에 시달렸다. 커피를 달고 살다 보니 자율신경계가 이상해졌는지 눈이 쉬지 않고 떨리는 병에 걸려 마그네슘을 아무리 먹어도 낫지 않고 대학생이었던 당시로서는 거금을 들여 한약을 한참 먹고나서야 나았다. 내가 원해서 살았음에도 남에게 결코 권장할만한 삶은 아니었다. 심지어 직장에 들어오니 내가 원하지 않아도 야근에 치어 강제로 더욱 부지런해졌다. 그러다 피곤해지고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고 나면 메니에르병과 눈떨림이 다시금 오고는 했다. 어지럼증은 이제 환절기 때마다 조금씩 찾아온다. 아이를 낳고 30대 중반이 되니 메니에르병이 재발하면 이제는 걸을 수 조차 없도록 어지럼증이 심하게 온다. 그러니 자꾸 부지런하고 생산적인 것에 몰두하는 삶을 두고 갓생이라 칭하며 높이는 것은 우리 모두를 무리하게 하고 아프게 하지 않을까 우려가 드는 것이다. 우리의 건강을 희생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나라 사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부지런한 삶을 강요해 왔다. 아차, 그렇게 강요해 왔으니 그걸 그대로 살아내는 것을 무려 신의 삶이라고 칭송까지 하는 건가. 그런데 누구나 그렇게 살 필요도 없고 모두가 그렇게 살아서도 안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살기 위해 태어났다. 뇌과학자나 유전공학자들의 책이 우리의 목적을 생존과 번식이라고 규정했지만 그래서 그냥 살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냥 우리도 모르게 태어났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가 태어난 목적 자체는 없다고 가정해도 큰 무리는 없다. 이런 가정 속에서 인간의 상태는 둘 중 하나다. 죽었거나, 살았거나.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죽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지 않고 계속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라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죽지 못해 산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것 역시 결국 살고 싶다는 표현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가 태어나 지금 살고 있는 목적은 기본적으로 사는 것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왕 살려면 행복해야 한다.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누가봐도 행복한 상태가 불행한 상태보다 낫다. 또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과 불행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행복을 택할 것이다.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렇게 모두 행복을 꿈꾼다. 다만 인간 삶의 기본값은 고난과 걱정이다. 그 어떤 행복한 기억도 반복되면 익숙해지고 더 이상 행복이 아니게 되지만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고 데미지만 누적된다. 때문에 행복한 삶이란 매우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삶, 그러니까 갓생을 굳이 정의 한다면 부지런한 삶보다는 행복한 삶을 갓생이라 해야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내 삶에서 가장 갓생에 가까운 삶은 육아휴직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영유아기 때를 제외하면 가장 많이 자고 있다. 일할 때 피곤해서 능률이 떨어질 것을 걱정하지 않고 체력의 한계까지 운동할 수 있다. 집안일을 얼추 끝내고 나면 어린이집에서 하원한 아이를 붙들고 놀아주다가 저녁을 준비하고 또 아기와 함께하다 세 식구가 한침대에 누워 잔다. 중간중간 시간이 잠깐씩 남는 때가 있어 회사 다닐 때보다 책도 많이 읽고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한다.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 아기 엄마도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고 아기도 보살핌의 공백이 없으니 와이프도 아기도 더 행복한 것 같지만 누구보다 가장 행복에 충실한 삶은 내가 살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참 뛰어난 사람도 많고 덕이 많은 사람도 많아서 부러운 사람들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도 부럽지 않다. 그냥 좋다, 삶이. 그게 신기했다. 대학교에 입학해 와이프를 만난 이후 인생에서 불행하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삶 자체가 행복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냥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할 때도 더러 있으니 인생은 어쩌면 아름답다 싶은 적이 간혹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매일마다 행복이 지배적인 이 삶이 신기했기에 그 이유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왜 행복할까, 도대체 왜 행복한 것일까 하고.


 그렇게 생각한 끝에 인간에게 있어 보편적인 행복의 요소라고 느낀 것이 두 가지다. 하나가 성취, 또 하나가 시간이다. 왜 솔직하지 못하게 돈을 제외했냐는 생각도 있겠지만 우리 집의 소득은 육아휴직 이전보다 크게 줄었다. 빈곤하지 않음은 행복의 전제조건일 것이나 빈곤함을 벗어난 삶은 저 두 가지가 좌우하는 것 같다. 다만 빈곤하지 않다는 것도 상대적이다. 어느 나라에서는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고 최소한의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으면 빈곤하지 않은 삶이지만 우리나라는 그것보다 좀 더 갖춘 삶이라야 빈곤하지 않은 삶이라 인정된다. 그래서 돈을 인간 행보의 보편적인 요소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빈곤함을 벗어나고도 일정 수준 이상까지는 돈이 늘어날수록 행복하다는 연구결과를 어디서 읽은 것 같은데 그것 역시 돈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거나 소득의 증진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는 것처럼 시간과 성취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보면 나의 지금 삶이 괜찮은 연소득을 버리고 시간과 아이와 와이프의 사랑이라는 성취를 산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취가 뭐 그렇게 큰 성취를 뜻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가끔 나의 집안일을 인정해 주는 와이프의 툭, 던진 한마디. 뭐 이를테면 '주부 다 되었네.' 하는 소리들 말이다. 또 아기가 어린이집에서 하원할 때 육아휴직 시작 당시에는 하원을 새로(?) 담당한 아빠를 보고서 엄마를 찾다가 이제는 어린이집 문이 열리자마자 아빠한테 안겨들어오는 그런 아들을 보는 뿌듯함 정도다. 내가 조리한 음식을 아직 말도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 아들 녀석이 '맛있떠.' 하면서 맛나게 다 비울 때면 인생 그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을 정도의 진한 여운이 남는 성취감을 느낀다. 성취감을 내가 만들 때도 있다. 원래 우리 아들은 자다가 와이프가 옆에 없다고 느껴질 때면 울어버리곤 했는데 지금은 내가 대신 손을 잡아주면 잘 잔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와이프가 어디 친구들이랑 여행을 가는 것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와이프가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 와 다시 셋이 잠들어가는 밤 그런 변화를 혼자 머릿속에 떠올리며 관조하다 보면 와이프나 아들이 굳이 나를 인정해 주는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혼자서 좋다. 또 아이를 어린이집 보내고 가계부를 적어 육아휴직 전과 비교하면 정말 확연히 줄어든 우리 가구의 생활비를 보면 혼자 그 몇십만 원을 벌어낸 것처럼 뿌듯함이 가득하다. 그런 성취가 일주일에 두어 번은 넘다 보니 집에서 혼자 밥 챙겨 먹으며 뭔가 외롭다 가다도 다시 정신이 번쩍 들며 행복감에 젖어드는 시간이 많아 그냥 내 삶을 돌아보면 '행복하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직장생활에서도 물론 성취감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직장에서의 성취감은 내가 아무리 성취를 해도 몇 일 뒤면 그런 성취가 아예 없었다는 듯 돌아가는 조직에서 느끼는 외로움의 후폭풍 때문에 결국 똔똔이가 된다는 것. 또 주변에서 인정해 주는 일이 있어도 그게 한 달에 몇 번 되지도 않고 그렇게 인정받아봤자 실수 한 번이면 열 번의 성취가 한 번의 실패로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심지어 조직에서 인정받고 나면 오히려 일이 더 많아져 있을 때도 많다는 것. 그런 꽤나 큰 차이가 성취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하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사랑만이 결혼의 유일한 현실이다.' 하는 말도 시간과 성취라는 두 단어로 달리 써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결혼은 서로를 위한 시간들을 보내며 둘 나름대로의 성취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만이 현실이고 그 이외에는 없다는 말로 말이다. 또 결혼에서의 사랑이란 서로의 행복을 생각하고 노력하는 시간의 합과 그것으로 함께 느끼는 성취감의 곱이라는 함수로 표현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나는 사랑이란 최소한 성욕 그 이상의 것이라고 확언하면서 결혼의 이데아를 손을 꼽 맞잡고 걷는 노부부로 이전 글에서 표현한 바 있다. 그 노부부의 맞잡은 손이 상징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노고를 보낸 시간과 그것으로 함께 이뤄낸 성취 이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이를테면 밤낮없이 자기 자리에서 서로를 또 자식을 먹이고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며 함께 늙어버렸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함께 살아냈다는 성취 말이다. 혹은 늙어감이 한없이 서럽지만 그래도 내 삶에 당신 하나는 남아 이렇게 있어준다는, 그렇게 있을 수 있도록 각자 손에 주름이 다 잡힐 때까지 노력했다는 진한 성취감 말이다. 이런 성취에는 억 소리 나는 자산도 출세한 자식도 필요치 않고 그저 서로를 위해 주름을 늘려간 서로의 삶이 있을 뿐이니 행복에도 사랑에도 시간과 성취, 그 두 단어가 혹은 그 두 단어만 새겨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엄혹한 우리나라의 사회 현실을 함께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결혼은 사랑만이 현실이지만 우리나라는 그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 내 생각에 우리나라가 아기를 낳고 살기 좋지는 않아도 출생률 0.7명일 정도는 아니지만 그것은 육아휴직 및 복직이 온전히 보장되는 직장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결혼 혹은 출산대해 막연히 안 좋게 깔려있는 세간의 오해를 풀었을 때를 가정한 이야기다. 남자의 육아휴직과 복직까지 온전히 보장되는 직장에 다닌다면 결혼하고 애낳아 키우기야 가장 좋겠지만 우리나라에 그런 직장은 대기업 중에서도 드물고 공무원 사회에서도 아직 눈치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평균 이상의 소득과 여건을 가진 사람이면 충분히 풍족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육아휴직에 눈치를 주는 직장에 다닌다면 감히 결혼과 출산을 '권장'까지는 못하겠다. 물론 육아휴직이 잘 보장되지 않더라도 그런 남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고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남자로서 육아휴직 쓰기에 괜찮은 직장을 다니는 입장에서 감히 그런 분들에게 그저 남의 입장에 서서 함부로 결혼 출산을 권장할 수 있는 사회가 이나라는 아니다.


 시간과 성취, 그리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만들어가는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기업과 직장 문화는 가히 '쓰레기'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제시간에 퇴근하기 눈치 보이는 업무량과 그에 걸맞은 OECD 최고 수준의 근로시간을 갖고 있다. 그런 근로문화에서 육아휴직을 쓴다면 당연히 출산 당사자인 임산부일지라도 눈치가 보이기 쉽상이다. 출산율이 재앙 수준이라고 하면서 이런 기업문화를 전반적으로 뜯어고칠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수준 낮은 기업들은 심지어 여자가 자기 출산으로 인해 육아휴직을 쓰는 것도 눈치를 보도록 하고 복직을 하더라도 제자리가 없을 것처럼 눈치 주는 문화가 만연해있다. 공무원이라고 다르지 않다. 법정 육아휴직이 겨우 아이 어린이집 보낼 수 있는 수준까지인 1년이면서 그 이후 육아를 위한 조기출퇴근 제도를 사용하면 대놓고 눈치를 주고 별 것 아닌 걸로 시비를 거는 꼰대들이 무려 같은 여자들 중에서도 많은 것에 대해 우리 와이프는 처음 공무원이 되고 나서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공무원 사회가 이럴진데 일반적인 직장 사회는 오죽하랴. 또 살인적 근무량도 중소기업이라면 과도한 야근도 무조건 배려해 주는 우리나라 법제도에서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결혼 출산을 통한 행복은 커녕 자기 스스로를 지켜내기도 벅찰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삶이 빡빡하니 같은 여자라도 육아휴직 쓰는 여자를 반목하는 수준 낮은 인식을 사회가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열심히 일한 근로자들에게 그만큼의 성취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가 중소기업이 많은 지방 도시에서 처음 은행생활을 시작하며 충격받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열악하게 운영하는 중소기업이 정말 많지만 또 한 편으로는 돈을 정말 잘 벌고 기업의 재무제표에는 매년 십억, 백억이 넘는 이익이 꽂히는데 직원들의 평균 연봉은 2016년 기준 3천만 원을 조금 넘는 기업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그 기업들은 심지어 이익이 법적으로 다수 주주들에게 공유되는 상장기업도 아니니 실제로는 회사 창업자나 소유주 1인이 억 소리는 그냥 넘는 이익을 다 가져간다. 심지어 직원이 백 명 가까이 된다는데 그 직원들의 급여를 모두 합친 것보다 회사 이익이, 그러니까 사장 1인의 이익이 더 많은 기업도 봤다. 그 기업들은 재무제표의 맥락을 보건대 충분히 성장하고 싶으면 해외로 매출을 들리는 도전도 할 수 있고 그를 위해 직원을 더 뽑을 수 있는 회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기업이 상장을 해서 이익을 공유하거나 성장을 해서 중소기업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제도를 갖고 있다. 공무원들은 다른 방식으로 시간도 성취도 모두 빼앗아간다. 젊은 하급 공무원들에게는 살인적인 업무량을 맡기면서 십수 년 넘게 일한 고연차 공무원들은 노는 경우가 허다하다. 열심히 일하는 고연차 공무원은 그 자체로 젊은 공무원들에게 희귀한 상사로 존경과 대우를 받는다. 이것은 많은 사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회사 다니는 또래들과 만나서 술 한잔 기울이며 이야기할 때 본인들이 업무라고 워드로 피피티로 쓴 보고서의 8할은 그냥 윗분들의 치장을 위한 것이며 기업의 이익과 매출을 위해서는 한낱 재활용 가능한 종이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고백은 기업의 종류를 막론하고 늘 나오는 이야기다. 그렇게 모두들 성취 없이 시간 없는 삶을 살아가니 자식을 낳을 생각도 못한다. 어차피 자식 키울 시간도 없고 귀한 시간 내어 자식 키워봤자 8할은 나처럼 살겠구나, 하고.


 그러니 감히 결혼 출산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행복의 경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으로서도 많은 경우 결혼 출산을 감히 권하지 못한다. 주변에 권하더라도 "포기하면 행복해져."하고 갖가지에 대한 포기를 씁쓸한 웃음을 띠며 전제해야 한다. 인생이라는 것이 포기하면 행복해지고 인간에게 자유란 사실 포기할 자유 외에는 거의 없기도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많은 경우 포기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들에게 더욱 그렇다. 육아휴직이 사실상 여자들에게만 주어지거나 그마저도 열악한 기업은 반강제적 퇴사로 이어지다 보니 육아의 몫은 여자가 된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은 남자들을 굴리기(?) 더 쉽다고 생각하며 남자들에게 중요한 일을 몰아주게 되고 남자들은 육아에 적극 관여할 시간이 없어 다시 또 육아의 몫이 여자에게 쏠리는 현상이 반복된다. 그렇게 출산한 여자들에게는 공고한 유리천장이 2023년 오늘도 형성된다. 여자는 출산을 하는 순간 커리어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두 명이라도 낳는 순간 여자는 거의 직장에서의 야망은 그냥 오래 다니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고 해도 우리나라에서 과언은 아니다. 물론 나는 커리어를 포기해도 헌신적으로 내 아기를 키우는 경험이 대부분 여성에게는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 확신한다. 내 여자 직장 선배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남자다. 내가 감히 여자들에게 그런 것들을 다 포기하고 아기를 낳으라고 진지하게 말할 수는 없다.

 

 남자의 경우에는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남자로서 육아휴직을 하며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육아휴직 여건으로만 보면 정말 칭찬할 것 밖에 없을 정도로 좋은 회사다. 병 나도록 일하며 흐려졌던 소속감과 근로의욕이 육아휴직을 하면서 오히려 커지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같은 직장에 다니는 주변에서는 내가 육아휴직을 하면서 마치 이후의 승진은 포기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요즘 시대에는 너에게 그래도 기회가 있을 수도 있을 거야.' 하는 위로의 말도 들었다. '너처럼 내려놓고 다녀야 하는데.'라는 말도 들었다. 나는 승진을 위해 직장을 다니지는 않지만 그 어떤 것도 내려놓지 않았다. 나는 내가 종사하는 업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정년까지 내가 받는 연봉 이상의 가치를 주주와 사회에 만들어낼 각오를 하고 있다. 휴직을 통해 다소 병들었던 몸도 많이 회복되어 몸이 축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내가 마치 지금까지 일하며 쌓아온 능력이나 인정을 다 내려놓은 것처럼 생각하거나 그래야 할 수도 있을 것처럼 위로를 한다. 정말 많은 것을 시사하는 지점이다. 방금 출산에 있어 여자들이 더 많은 포기를 한다고 했지만 실상 남자들은 출산을 하자마자 육아에 대한 행복을 거의 확정적으로 포기하도록 강요당하는 것은 아닐까. 다만 나는 그렇기에 더더욱 남자로서 주변에 결혼을 고민하는 남자들에게는 어떻게든 정년까지 버틸 수 있는 직장인지 물어보고서 나서 버틸 수 있는 직장이라면 거리낌 없이 육아휴직을 권장한다. 나만 쓰기 아까울 정도로 좋은데 심지어 사회적으로도 매우 바람직하다. 남자들이 육아휴직을 쓰는 문화가 널리 퍼져 남자 육아휴직을 할 수 없는 직장은 도태된 곳처럼 만들어버려야 출산율이 조금이나마 올라갈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남자 육아휴직이 권장되고 보장되는 사회적 여건 없이는 저출산 해결을 위한 백약이 무효할 것이라 본다. 그렇기에 남자들이 쓰는 육아휴직은 그냥 열심히 집안일 하고 아이와 행복하게 지내기만 해도 그 자체로 사회공헌이요 사회봉사다. 그래서 더욱 권한다.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에만 집중하는 대가로 사회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 남자의 육아휴직 빼고 또 뭐가 있을까. 


 남자가 거리낌 없이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정말 많은 것을 상징한다. 남자들까지 육아휴직을 써도 즉시 업무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인력이 있다는 말이 되고 그 말은 즉슨  OECD 평균 정도는 되는 업무량과 평소 근로시간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 말은 행복과 사랑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을 인간에게 부여하고 있다는 말이 되고 내 아이도 행복과 사랑을 영위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여성에게 편중된 육아가 남자에게도 분담되니 출산을 한 여성도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일에 대한 욕심이 많음에도 육아휴직을 시작한 데에는 이런 맥락들에 대한 내 나름의 결심도 있었다. 육아휴직을 하기 전에도 정말 최선을 다해 육아를 도왔지만 나는 끝내 부양육자가 아니었고 그냥 양육 보조자였다. 그 차이는 마치 한 회사에서 똑같이 사장을 보조하더라도 부사장과 비서의 차이가 큰 것과 같다. 나는 제대로된 육아휴직을 통해 제대로된 부양육자가 되고 싶었고 그 목적은 어느정도 성취되고 있다. 그 결과 와이프는 비록 업무성과에 따라 빠른 승진과 소득 증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직장에 근무하면서도 일에 대한 몰입과 만족도가 높아졌다. 


 이처럼 육아는 남녀모두에게 고생될지언정 너무도 행복한 경험이기에 남자의 육아휴직이 보장되는 문화가 정착된다면 굳이 현금 지원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아이를 낳는 부부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렇기에 인구의 감소가 종사하는 산업에 직격탄이 되는 은행업 종사자 입장에서 나름 비장한 각오로 행복을 추구해보기로 한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행복하니 주변 비슷한 여건의 남성들에게 출산과 육아휴직을 권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정말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까지의 모든 과정이 인간이 가장 행복해지고 존엄해질 수 있는 위대한 선택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것은 건강한 몸과 진정한 사랑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그 사랑도 못하도록 사회가 막고 있다. 그런데 언제였던가, 저출산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게 야간까지 보육시설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한다는 내용을 기사로 봤다. 썩은 웃음이 나왔다. 정책을 만드는 고위 공무원들도 행정고시를 합격한 공무원들은 살인적인 야근이 일상적이라고 알고 있다. 당연히 육아를 제대로 해 본 사람이 드물 것이다. 다들 딱한 사정에서 딱하기 그지없는 대안들이 열심히 추진되고 있다. 결국 많은 것이 발전된 지금 사회에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요구할 것은 시간, 딱 하나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시간과 성취이거나 시간과 성취가 결합된 사랑인데 사랑이건 성취건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시간만은 우리가 함부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모두가 갓생 살기를 바란다. 사랑하면서 행복하면 그게 갓생이다. 온 사회가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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