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1억짜리 실패가 남긴 것

빈 통장과 맞바꾼 시간

by 억대연봉파파

퇴직금을 깼다.

그리고 그 돈마저

사업 준비와 생활비로 빠르게 증발했다.

숫자로만 따지면 내 인생 최악의 적자였다.


내가 받던 연봉의 기회비용을 제외하더라도

퇴직금과 사업 준비에 들어갔던 각종 비용을 합치면,

지난 1년 동안 거의 1억 원에 가까운 가치를

태워먹은 셈이었다.


"그 중요한 시기에 1년을 쉬다니..."

누군가 "미친 짓이다" 라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잔고가 '0'을 향해 갈수록

내 마음은 묘하게 차분해졌다.


돈은 잃었지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과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1. 갈등과 깨달음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난 1년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마음 한구석엔 늘 조급함이라는 불씨가 있었다.

사업 구상을 하고

샘플을 보러 다녀야 할 금 같은 시간에,

아이 등하원을 시키고

놀이터에서 놀아줘야 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지금 경쟁자들은 뛰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아내와 아이에게 시간을 뺏기는 것 같아

속으로 불만을 삼킨 적도 많았다.


사업 준비에 내 모든 시간을

갈아 넣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통장 잔고가 바닥나고,

잠시 멈춰 서서 지난 1년을 되돌아봤을 때

나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10년간 회사에 충성하며 바쁘게 살았던 시간보다

투덜대며 아이와 보낸 이 1년의 추억이

압도적으로 많고 선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조급함은 뒤로한채

기꺼이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반짝이는 눈망울로 놀자고 아이에게

실망을 안겨주기 싫었다.

2. 다시는 오지 않을 '골든타임'

하원을 하며 나누던 소소한 대화,

처음으로 킥보드를 가르쳐 준 날,

아빠가 집에 있어 너무 좋다며

내 품에 안겨 잠든 딸아이의 숨소리.

딸아이의 인생에서

부모가 세상의 전부인 시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결정적 시기에 내가 함께 있었다.

만약 회사를 계속 다녔거나

사업이 대박 나서 바빴다면,

나는 돈은 벌었겠지만

내 딸의 가장 예쁜 시절은 영영 놓쳤을 것이다.


"사업 타이밍은 놓쳤지만, 육아 타이밍은 잡았다."

정신승리라고 해도 좋다.

1억 원? 물론 큰돈이다.

하지만 30억을 준들 내 딸의 세 살 시절을

다시 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나는 비록 '가난한 아빠'가 되었지만,

딸아이에게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시간 많은 부자 아빠였다.

이 시간들이 훗날 아이의 정서에

평생 남을 자산이 될 거라 확신한다.

그래서 지난 1년의 공백과 수업료가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3. 고독이 준 선물: 나를 재정의하다

가족과의 시간만큼이나 값졌던 건,

나 자신과의 대면이었다.


회사에 다닐 땐 생각할 틈이 없었다.

닥친 업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하지만 백수가 되니 넘치는 게 시간이었다.

새벽 러닝을 하며, 텅 빈 공유 오피스에 앉아

나는 끊임없이 자문자답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내가 진짜 잘하는 건 무엇이고,

부족한 건 무엇인가?"


나는 기획과 실행력은 강하지만,

꼼꼼함과 계획성은 부족한

전형적인 INTP이다.


지난 10년의 회사 생활은

시스템 덕분에 빛난 것이었고,

야생에서의 나는 생각보다 나약했다.

이 뼈아픈 자기 객관화는

1억 원짜리 MBA 과정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값진 수업이었다.


준비 없이 퇴사한 건 섣부른 실수였지만,

그 실수를 통해 나는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되었다.

4. 갈림길: "객기인가, 용기인가"

이제 선택의 시간이었다.

통장 잔고는 바닥났고,

스마트 기어 개발은 막대한 추가 자금이 필요했다.


Option A: 대출을 풀로 당겨서 사업에 올인한다.

Option B: 잠시 멈추고 다시 현금을 확보한다.


1년 전의 자만심 넘치던 나였다면

A를 택했을 것이다.

"하면 된다"는 객기로.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도박이라는 것을.

내 욕심을 위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가족의 생존을 걸 수는 없었다.


"인정하자. 지금 나는 총알이 다 떨어졌다."

사업을 포기하는 게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하드웨어 스타트업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잡으려면,

훨씬 더 많은 자본과 시간,

그리고 철저한 계획이 필요하다.


5. 전략적 후퇴: "다시 벙커로"

결국 나는 결단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

아직 패배 선언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총알이 떨어지면

본진으로 돌아가 보급을 받아야 한다.

나에게 회사는 이제 평생직장이 아니라,

다음 도약을 위한 보급 기지(Bunker)이다.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 다시 취업할까 봐."

아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잡았다.

"오빠, 그동안 충분히 고생했어.

그리고 많이 도전했잖아.

이제 좀 안정적으로 가도 돼."


그 말에 울컥했다.

가장의 무게를 내려놓고,

다시 월급쟁이의 갑옷을 입기로 했다.

하지만 1년 전의 나와는 다를 것이다.


더 이상 회사에 충성하는 '노예'가 아니라,

회사를 이용해 내 꿈을 준비하는

직장인으로 돌아갈 테니까.

[다음 이야기]

마음을 먹자 행동은 빨랐습니다.

노트북을 켜고 링크드인 상태를

'Open to work'로 바꿨습니다.


자존심은 접어두고, 생존 본능을 깨웠습니다.

이미 너무 늦은 것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잠시.

거짓말처럼 시장이 반응했습니다.

"이사님, 혹시 OOO 포지션에도 관심 있으신가요?"

헤드헌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2부의 마지막 이야기,

"다시 월급쟁이가 된 첫날"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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