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결정의 순간: Go? Stop?

깨져버린 퇴직금, 그리고 '스마트'한 꿈의 가격표

by 억대연봉파파

퇴사 후 9개월.

벌써 계절이 세 번 바뀌었다.


생활 패턴은 어느새 스타트업 창업자가 되었다.

새벽에는 러닝 테스트를 하고, 오전에는 개발 미팅,

오후에는 정부지원사업 사업계획서를 썼다.


3분기가 지나자,

내 개인 통장의 잔고가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회사 생활 10년의 마지막 보루이자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퇴직금'뿐이었다.


1. 하드웨어의 높은 벽: 개발비용

내가 구상한 아이템은 단순한 의류가 아니었다.

활동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트래킹 하고 분석해 주는

'스마트 스포츠 기어'였다.

단순 제조가 아니라 기술이 들어가는 제품.

기획 단계에서는 완벽해 보였다.

시장의 니즈도 확실했고, 내 경험과도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개발 견적서를 받아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대표님, 이건 금형비만 수천만 원이고요.

센서 모듈 개발하고 앱(App)까지 연동하려면...

최소 2~3억은 생각하셔야 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었다.

단순 의류는 원단값과 공임비만 있으면 됐지만,

스마트 테크 제품은 회로 설계,

시제품 제작, 금형, KC 인증, 앱 개발까지...

돈 들어가는 구멍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아, 내가 판을 너무 크게 벌렸구나...'

2. 희망 고문: 정부 지원사업

내 자본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깨닫고,

나는 정부의 R&D 지원사업에 목을 맸다.

초기 창업 패키지, 디딤돌 과제, 팁스(TIPS)...

수억 원을 지원해 준다는 공고들이

나에게는 유일한 동아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동아줄은 썩은 동아줄일 수도 있었다.

경쟁률은 수십 대 일, 심지어 백 대 일이 넘었다.

이게 100% 된다는 보장이 없었고

되면 사업자금에 지원이 되는 것이지

전적으로 이것만 믿고 진행하는 건 무리였다.


되면 대박이지만, 안 되면?

나는 시간과 돈만 날린 셈이다.

가족의 생계를 담보로 '확률 게임'을

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원사업 공고 날짜만 기다리며

손가락을 빨고 있는 내 모습이 처량했다.


3. 최후의 보루, 퇴직금 계좌를 열다

개발비는 고사하고,

당장 다음 달 생활비가 문제였다.

아내가 운영하는 공간대여 스튜디오에서

수익이 나고 있었지만,

대출 이자와 관리비, 아이 교육비,

3인 가족의 식비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


고정비의 공포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결국 나는 은행 앱을 켰다.

IRP(개인형 퇴직연금) 계좌 해지.


이 돈만큼은 내 노후를 위해 남겨두려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밥 굶게 생겼는데

노후가 무슨 소용인가.

"확인" 버튼을 누르는 순간,

지난 10년간 회사에서 갈려 나갔던 내 청춘의 대가가

허무하게 '생활비' 명목으로 녹아내렸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4. 부사장 명함을 떼고, 단기 알바를 뛰다

퇴직금마저 헐어 쓰게 되자,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나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구인 사이트를 뒤져 단기 계약직업무를 찾았다.

"영어 통번역 급구."

"스타트업 사업계획서 컨설팅."

"단기 프로젝트 PM 구함."

가리지 않고 지원했다.


불과 1년 전, 글로벌 본사와 전략을 논의하던 내가

이제는 건당 얼마짜리 용역을 따내기 위해

제안서를 쓰고 있었다.

낮에는 '혁신적인 스마트 기어'를 만드는 창업가,

밤에는 마감 기한을 맞추기 위해

엑셀 노가다를 하는 알바생.

이 이중생활은 처절했다.

내 퇴직금은 아주 빠르게 녹아들었고

알바비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5. "고(Go)인가, 스톱(Stop)인가"

현금은 바닥났고,

제품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다.

남은 돈을 털어 시제품을 완성한다 해도,

마케팅비와 양산 비용은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이미 잔고가 바닥난 상황에서,

불확실한 기술 개발에

우리 가족의 남은 미래를 태울 자신이 없었다.

자신감이 자만심이었음을,

그리고 제조 스타트업의 벽이

얼마나 높은 지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투자자를 찾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내 전문 분야도 아니었고

일부 도움을 받을 분들까지 섭외해 두었지만

이건 판이 너무 컸다.


나는 멈춰 섰다. 그리고 인정했다.

"나는 지금... 쫄았다."


[다음 이야기]

퇴직금까지 건드렸지만,

'스마트 기어'의 꿈은 요원했습니다.

개발은 자금 문제로 중단되었고,

나는 알바와 단기 계약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힘들었던 이 1년의 시간이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었습니다.

바로 가족, 특히 딸아이와 함께 보낸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빈 통장과 맞바꾼 딸아이와의 추억,

그리고 다시 갈림길에 선 저의 마지막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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