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회사원, 밤에는 택배 싸는 김사장
입사 5년 차.
나는 회사에서 소위 '잘 나가는 놈'이었다.
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아시아 총괄 임원이라는 타이틀을 달았고,
회사에서는 나를 차기 리더로 주목했고
그 안에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전략가였다.
하지만 퇴근과 동시에
내 머릿속은 딴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 명함이 사라지면 나는 무엇인가?'
화려한 타이틀은 회사가 빌려준 옷일 뿐,
내 살가죽이 아니라는 본능적인 불안감.
그 불안이 나를 움직였다.
나는 회사 몰래 나만의 '구명조끼'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사업을 시작한 건
회사 일이 가장 바쁠 때였다.
새벽에는 미국과, 밤에는 유럽과 회의를 했다.
누가 봐도 딴짓할 시간이 없는 상황.
그래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그 '방심'을 틈타 철저한 이중생활을 설계했다.
다행히 당시 우리 부부에게는 아직 아이가 없었다.
퇴근 후와 주말은 온전히 '자유 시간'이었다.
나는 당시 일을 쉬고 있던 아내를 포섭했다.
"나는 기획이랑 소싱, 마케팅을 할게.
자기는 CS랑 포장을 맡아줘."
아내는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주었고,
우리의 신혼집 베란다는 곧 물류 창고가 되었다.
내가 회사에서 업무를 보는 동안
아내는 주문을 처리했고,
나는 퇴근 후 잠을 포기하며
상세페이지를 만들고 소싱을 했다.
아이템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캠핑'으로 정했다.
처음엔 시중의 유명 브랜드 제품을 떼다
마진을 붙여 파는 것으로 시작했다.
낮에는 수십억 원짜리 프로젝트
예산을 집행하던 내가,
밤에는 2,500원 택배비 마진을 남기려
박스 테이프를 뜯었다.
"이사님, 이번 분기 매출 목표가
10M 달러입니다." (낮)
"고객님, 배송비 3,000원은 별도입니다." (밤)
이 극단적인 낙차가 처음엔 자존심 상했지만,
곧 깨달았다.
회사 돈 수십억보다,
내 손으로 번 3,000원이 더 묵직하다는 것을.
그건 회사의 시스템이 번 돈이 아니라,
계급장 떼고 오로지 내가 번 돈이었기 때문이다.
단순 리셀로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중국 알리바바를 뒤져 공장을 찾고,
내 로고를 박아 자체 제작(PB) 상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 회사에서 습득한 역량이 빛을 발했다.
무역 영어나 계약서 검토는
나에게 숨 쉬듯 익숙한 일이었다.
중국 공장 사장들과 위챗으로 협상하며
단가를 후려칠 때,
나는 회사에서 배운 영업 스킬을
내 사업에 200% 활용했다.
결정적인 한 방은 '해외 브랜드 총판권'이었다.
국내에 공식 수입원이 없던
해외 캠핑 브랜드를 발견하고,
매출도 얼마 안 되는 개인 사업자인 나는
마치 규모 있는 회사의 영업 사원인척
제안서를 보내면서
비즈니스 매너와 시장 분석력을 갖춘
'파트너'로서 접근했다.
"한국 시장은 지금 폭발 직전이다.
너희의 브랜드를 해치지 않고
한국이라는 시장에 진출할 기회다."
결국 판권 계약을 따냈다.
경쟁자들이 최저가 출혈 경쟁을 할 때,
나는 '공식 판매처'라는 방패 뒤에서
안정적인 마진을 확보했고,
매출은 수직 상승했다.
매출 그래프는 아름다운 우상향을 그렸다.
웬만한 직장인 연봉 수준의 매출이 나오기도 하며
창고를 구하고 알바를 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월말 정산을 하고 나면
계산기를 든 손이 멈칫했다.
'나쁘진 않은데... 내 연봉을 대체할 수 있나?'
순수익이 적은 건 아니었지만,
이미 억대 연봉을 받고 있는
내 기회비용이 너무 높았다.
사업으로 이 연봉을 완전히 대체하고
리스크까지 감당하려면,
지금보다 매출이 훨씬 더 커져야 했다.
게다가 유통업의 본질적인 딜레마인
'재고'가 발목을 잡았다.
다행히 아내 명의로 사업을 한 덕에
세금 문제는 없었지만,
벌어들인 돈은 고스란히
다음 시즌 물건 값으로 들어갔다.
장부상으로는 이익인데
통장에 현금은 없는 '돈맥경화'의 연속.
그제야 회사가 다시 보였다.
마케팅비 0원, 재고 부담 0원.
매달 25일이면 어김없이 꽂히는 고액의 월급.
그것은 내 사업이라는 '고위험 자산'을 지탱해 주는
가장 든든한 '현금 파이프라인'이자
'리스크 헷지' 수단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장 놀이'의 환상에 취해
해사표를 던지는 대신,
다시 겸허하게 넥타이를 매고 출근길에 올랐다.
더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리며...
[다음 이야기]
그렇게 '회사원'과 '사장'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꼬박 3년이나 이어졌습니다.
몸은 부서질 것 같았지만,
어느덧 사업은 안정 궤도에 올랐고
업계에서 제법 입소문도 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대표님 브랜드, 저희가 인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