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갚았지만, 자만심은 남았다
사업체를 매각하고 통장에 꽤 큰 목돈이 꽂혔다.
하지만 그 돈은 내 통장을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던
역전세 보증금을 세입자에게 송금했다.
남은 돈으로는 사업 운영과
주택 구매 자금으로 끌어다 썼던
신용대출 일부를 상환했다.
모든 정산을 마치고 통장을 확인했다.
"어라? 생각보다 별로 안 남았네."
엑시트라는 거창한 단어 뒤에 남은 현실은 소박했다.
슈퍼카를 뽑거나 빌딩을 살 정도의 돈벼락은 없었다.
그저 '빚 없는 직장인'으로 돌아온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통장의 잔고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 남은 '잔상'이었다.
비록 여유 현금은 많지 않았지만,
매달 나를 옥죄던 대출 이자와
전세금 반환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심리적 부자'
이것이 나를 망친 단어였다.
실제 자산은 크게 늘지 않았는데,
멘탈은 이미 수십억 자산가가 되어 있었다.
"위기가 와도 내 힘으로 해결했다"는 성취감이,
"나는 언제든 돈을 만들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변질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무렵, 회사에서는 나를
그룹의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드디어 임원진의 핵심에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업무는 더 재미없어졌다.
그동안은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플레이어'였지만
부사장은 하루 종일 회의실에 앉아 정치를 조율하고,
뜬구름 잡는 보고를 받는 '관리자'였다.
몸은 편안한 에어컨 바람 아래 있었지만,
내 본능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피 말리는 자금 압박을 이겨내고
엑시트를 만들어냈던 그 짜릿함에 비하면,
회사에서의 업무는 너무나 시시하고 지루했다.
"나는 사냥꾼인데,
동물원 사육사가 된 기분이네."
안락한 임원실이 나에게는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직장인이 회사를 다니는 가장 큰 동력은 '공포'다.
"이 월급이 끊기면 대출 이자는 어쩌지?"라는
공포가 우리를 인내하게 만든다.
하지만 한 번의 작은 성공을 맛본 뒤엔,
나에게서 그 '공포'가 거세되었다.
통장에 현금은 별로 없었지만,
"빚은 없다"는 사실이 나를 오만하게 만들었다.
"이사님, 본사에서 이 리포트 주말까지 요청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군말 없이 했을 일을, 이제는 들이받았다.
"그게 지금 비즈니스에 무슨 임팩트가 있죠?"
동료들은 "부사장 되더니 배짱이 두둑해졌다"라고
했지만, 착각이었다.
그것은 리더십이 아니라,
그저 '절실함이 사라진 자의 객기'였다.
오히려 통장에
현금이 넉넉하지 않다는 사실이 퇴사를 부추겼다.
월급만으로는 내가 원하는
‘경제적 자유'에 도달하기엔
너무 느려 보였다.
내 머릿속 회로는 위험하게 돌아갔다.
"회사 다니면서 곁다리로 해도 그 정도는 벌었는데
퇴사하고 전업으로 내 사업을 하면?
지금보다 10배는 더 벌어서
진짜 부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논리가 아니라 희망 사항이었다.
지난 성공이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과
'월급'이라는 든든한 심리적 지원군
덕분이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었다.
"이제 내 그릇을 키울 때가 됐다.
이 시시한 회사 놀이는 그만하자."
그렇게 나는 번아웃을 핑계로,
사실은 '더 큰 한 방'을 꿈꾸며 사표를 던졌다.
회사에서 제안한 3개월의 휴직 기간조차
"어차피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며
안일하게 흘려보냈다.
(이것이 1화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나는 호기롭게 회사를 나왔다.
부사장이라는 타이틀도,
억대 연봉도 미련 없이 던져버렸다.
내 손에 쥐어진 건 많지 않은 현금과,
"나는 무적이다"라는 비대한 자만심뿐이었다.
10년 전, 맨주먹으로 시작해 임원까지 올랐던 남자는,
이제 스스로 헬게이트를 열고
다시 야생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던져버린 것이 단순한 '사표'가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을 지탱하던
유일한 '동아줄'이었다는 것을…
[다음 이야기]
화려한 임원 승진, 위기를 기회로 바꾼 엑시트,
그리고 그 성공에 취해 낭떠러지로 뛰어든 남자.
모든 준비는(준비가 안 됐다는 점에서) 완벽했습니다.
다음 화부터는
"퇴사 후 3개월, 여행의 낭만은 끝났고
현실은 냉혹했다"
(1화 시점 이후의 현실 복귀)로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