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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북카페 Oct 10. 2024

#3. 비겁한 변명보다 효과 빠른 처방

 그러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건 자기 합리화이자 방어기제이기 전에 구차한 변명 같기도 하다. 솔직히, 200퍼센트 소-올-직-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 귀찮게 하기 싫어서 전화를 안 하는 거니까.       

    

 남편한테 전화한다? 출근한 지 얼마 됐다고 전화호출이야, 업무보기 바쁜 사람한테. 민폐 1. 직계가족에게 전화 건다? 그러기에 그들은 너무 인싸다. 얼마나 공사다망들 하신데. 절반은 일터에, 절반은 모임에 나가 있을 시간인 거 뻔히 알면서, 아침 댓바람 전화는 민폐 2.      


 친구들은 또 어떻고. 남편 우쭈쭈에 애들 우쭈쭈로도 모자라 직장 내 생존배틀까지, 신경 쓸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독립심 강한 남편에 무자식 상팔자, 노터치 프리랜서인 내가 살려주라 읍소하는 건 너무 염치없지.


 119? 가뜩이나 낯가림도 심한데, 모르는 분한테 아쉬운 소리해야 한다니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다. 참자, 산소 호흡기 껴야 될 때쯤, 그때쯤 돼서야 실례 무릅쓰고 전화 걸기. 그전까지는 스스로 해결하기. 물만 셀프더냐, 인생도 셀프다. 어차피 무소의 뿔처럼 혈혈단신이라구.           


 그럼 하다 못해 신께 기도라도 해라 권하시겠지만, 그 역시 마뜩잖다. 처리해야 할 기도의뢰가 적어도 수 억 개 일 텐데, 거기에 나까지 거든다? 그야말로 진짜 민폐지. 신만큼 바쁜 존재가 또 어디 있다고, 거기다 대고 애걸복걸을? 듣는 God 부담스럽게? 산소 호흡기 뗄 때쯤 기도해도 늦지 않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하고 짧고 굵게 선인사 후대면 하는 쿨한 인간이고 싶다. 시도 때도 없이 지금 곧 만날 것 같습니다, 살려주십쇼!-라며 칭얼대는 피조물이고 싶지가 않네, 나는.           

 "비겁한 변명이군."- 하며 혀 차시는 독자님을 위해 이번에는 진짜 그럴싸한 변명을 늘어놔 보겠다. 누워서 곰곰이 내가 지금 생을 셧다운 한다면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뭘까 생각해 보니 그거 더라. ‘아, 나는 결국 해묵은 원고를 완성하지 못한 채 죽겠구나.’- 이게 제일 속상할 것 같더라.

     

 그 원고- 몇 년째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던 그 원고- 휴머니즘과 로맨스와 성장 드라마와 다큐와 픽션, 판타지까지 총망라한- 불후의 명작이 될 그 원고를 끝끝내 끝맺지 못하고 애꿎은 생(生)만 끝맺겠구나- 죽어서도 두고두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완성을 요원케 한 썼다 지웠다의 무한반복이 지나친 몸 사림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맞아, 몸을 너무 사리느라 글에 진척이 없었단 말이지.      

     

 “뭐 대단한 몸이라고 사리기까지 했대?” -라고 물으신다면, 이거 왜 이러실까. 이래 봬도 저, 나름 귀한 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귀한 딸,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내, 또 누군가에게는 애틋한 작가란 말씀입니다. 그러다 보니 행여 이런 말 듣게 될까 봐 자꾸 몸 사리게 되더란 말입니다.

          

“너 이런 애였니? 실망이다.”     
“당신 이런 여자였어? 정말 실망이야.”     
“자네 이런 작가였나? 참 실망일세.”          


 이런 평가받을 게 지레 겁나 쓰고 싶은 대로 쓰질 못하겠더라 고백하면... 이상해 보이려나? 무슨, 이 페이지까지 읽어 오면서 나 이상한 사람인 거 다들 눈치챘을 텐데, 놀랍지도 않을 걸.

           


 "그래요. 나 이상해요, 괴상해요, 망측도 하고."- 이렇게 뻔뻔한 자세로 밀고 나갔다면 탈고를 했어도 몇 번은 했을 텐데 – 누운 채로 후회를 곱씹는다. 이런 애든 저런 애든, 이런 여자든 그렇고 그런 여자든, 이런 작가든 그저 그런 작가든 – 나는 괘념치 않는다, 내 길을 갈 뿐이다 – 이런 두꺼운 민낯 마인드로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후회에 후회를 거듭한다.           


 그러다 문득, 아이디어 하나가 떠오른다. 끝내 벗어던지지 못할 자의식에 시달리고 있다면, 자의식 과잉을 잠재울 가면을 써보는 건 어때? 이를테면... ‘필명’ 같은 거 말이야!


"몰랐어요? 나 원래 이런 애예요."
"몰랐어? 나 뼛속까지 이런 여자야."
"모르셨어요? 나 원래 이런 글 쓰는 사람입니다."


 라고 샤우팅하는 듯한, 그렇게 두 눈 치켜뜨는 느낌의 필명!  ‘누가 뭐라든 나는 나다’ 식의 쎈케 만연한 그런 느낌적 필명!!


 좋아, 내가 이번 죽을 고비만 넘기면 그런 필명으로 하고 싶은 말, 적고 싶은 얘기 다 쓰고 살리라. 죽어도 여한 없을 만큼 다 쏟아내고 말리라. 비겁한 변명 뒤에 숨기 싫다면 비루한 필명 뒤에 숨는 수밖에.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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