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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북카페 Oct 11. 2024

#4. 얼지 마, 쫄지 마, 부활할 거야

 필명까지 지었겠다, 이젠 쓸 일만 남았다. 생을 다하는 그날까지, 공기 들이켜고 내쉬듯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이다. 자연스럽다. 내겐 글 쓰는 것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고용인으로 고착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나답다.    

       

 그래, 숨 쉬자. 숨 쉬듯 써 내려가자. 이런 애로 보일까 봐 얼지 말고, 이런 여자로 낙인찍힐까 봐 쫄지 말며, 이런 작가인 채로 생을 마감할까 봐 뒷걸음치지도 말 것. 늘 그랬듯, 나는 이번에도 부활할 테니까.    

       

 인생 삼세판이라고, 찐생은 3회 차부터다. 갓생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하고 싶은 것이다. 무엇을? 쓰는 것을. 뭘 쓰게? 나의 이야기일 수도, 너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보편타당한 삶의 궤적들을. 혹은 삶의 정상궤도를 벗어난 초월적 얘기를.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문제는 지금부터다. 썼어. 저장했어. 근데 오늘처럼 뜬금없이 깔딱 고개가 찾아온 거야. 그 고개를 못 넘기고 돌연 생을 마감해. 그럼 그때까지 써 놓은 원고- 다 어쩔? 아무도 모르잖아, 내 컴퓨터 비/밀/번/호.      

     

 씁... 남편한테만이라도 패쓰워드를 알려줘야 하나. 쓰읍... 그건 너무 수지맞지 않는 장산데. 그렇잖아, 나는 남편이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갈 때 일언반구 안 하거든. 조심히 다녀오시라고, 컴백에 맞춰 된장찌개 보골보골 해둘 테니 원 없이 칩거하시라고- 무언의 배웅인사를 건네거든.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지. 여자가 글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과 충분한 돈이 필요하다고. 돈은 모르겠고,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건 확실하다. 그 방이 다름 아닌 내 노트북인데, 이걸 공개하라고? 나는 그의 동굴 앞에 얼씬도 않는데?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타산이 맞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번호를 공유했다 치자. 이 또한 문제다. 서로의 사적영역을 존중하는 부부이기에 비밀 일기장 훔쳐보듯 노트북 커닝하는 일은 없겠지만, 어쩌면 그게 더 치명타일 지도. 생각해 봐. 소풍온 듯 세상 해맑던 사람인 줄 알았는데, 웬걸- 부재중 컴퓨터 열람을 해보니 까도 까도 양파네. 뭐? 은밀한 필명? 뭐어? 내밀한 소설? 뭐어어?... 뭐어어어어?...... 를 연발하다 그는 끝내 노트북을 덮고 말 테지. 안 되겠다, 이건 내가 안고 가야겠다. 이거슨 판도라의 상자다- 하면서.      

     

 나 대신 내 글을 떠안게 된 그의 생은 버거울 게다. 곱게 살다 간 아내로 남겨줘야 할지, 오늘만 사는 작가로 거듭나게 해야 할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할 테지. 그냥 늙어도 억울한데 그 고심 덕에 네 배는 가속노화할 테지. 아, 가엾은 남자- 내 그대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 어느 유명작가처럼 셀프로 원고를 불태우고 가야 할 텐데. 내가 언제 생사를 넘나들지 모르니 화형식 타이밍을 잡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결론은 - 살/아/야/겠/다. 그보다 하루만큼은 더 살/아/내/야/겠/다. 그를 잘 보내주고, 홀가분하게 원고를 태워버리는 거야. 그래도 여유가 있으면 그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동굴에도 입성해 보고, 들어간 김에 청소도 좀 해주고 그러지, 뭐.           


 근데 와아... 여기서 대/반/전. 그의 동굴에서 제2의 판도라 상자가 발견되는 거야. 그 상자를 염과 동시에 동공이 확장되며, 뭐? 뭐어? 뭐어어? 뭐어어어어? - 를 연발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자니 빙글빙글 아득해져 가던 정신이 번쩍 든다. 얼지 마, 쫄지 마, 부활해도 그의 동굴에는 절대 안 들어갈 거야.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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