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거리. 이따금씩 보이는 젊은 사람들. 거대한 현수막을 내건 학원들과 스터디카페. 밝은 햇빛이 내리는데도 무언가 어둡고 적적한 분위기.
신림동.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고시촌이다. 수험생들은 여기서 이제는 사라진 사법시험, 행정고시, CPA 등을 공부하고는 한다.
약 3주간, 내가 지낼 곳이었다. 면접 준비를 위해서였다. 신림동 생활은 3년이 넘는 수험기간 중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기맥정 실원들은 가끔 신림동에 대해 말하고는 했다. 거기는 식당이 싸고 맛있다고 한다. 행정고시는 보통 거기서 많이 준비하기에, 스터디를 하려면 꼭 가야 한단다. 조용하고 물가도 싸고, 수험생들도 많아 고시 공부하기 좋다고 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딴짓하기도 그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 PC방, 코인노래방, 당구장 등등 있을 건 다 있단다.
언젠가 TV에서 보던 광경이 떠올랐다. 츄리닝을 입은 채, 머리도 감지 않은 고시생들이 느지막이 일어나 독서실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다 밤늦게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고시생의 삶. 나에게 신림동은 그런 이미지였다.
그동안 나는 신림동에 갈 일이 없었다. 우선 고향이 부산이라, 신림동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게다가 나는 스터디도 하지 않았고, 학원도 다니지 않아서 굳이 신림동에 올 유인도 없었다. 무엇보다 돈이 없었다. 아무리 물가가 저렴하더라도, 타지 생활을 하면 기본적인 생활비와 숙박비가 생길 것이었다. 대신 나중에, 언젠가 면접 준비를 할 때 가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좋으나 싫으나, 면접 공부는 신림동에서 꼭 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림동 생활은 어떨까? 한창 부산에서 2차 시험공부를 하며, 나는 가끔 상상했다. 신림동에서 마지막 면접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하지만 그것이 정말 현실이 되리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면접 준비를 하려면 우선 그 어려운 2차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2차 시험을 붙은 나는 마지막을 위해 신림동에 와 있었다.
궁금했다. 내 눈앞에 놓인 여기가 대체 어떤 곳인지.
부산에는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원 같은 곳이 하나도 없다. 기껏해야 기맥정 같은 고시반이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사방이 행정고시 학원*이었다. 독서실이나 스터디카페도 널려 있었다. 왜 하필 스터디가 여기서 가장 활성화되어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 단, 신림동에도 행정고시 기술직을 위한 학원은 거의 없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물가였다. 굉장히 저렴했다. 대표적으로 신림동에는 ‘고시식당’이라는 밥집이 여럿 있었다. 대학 학식과 비슷한 가격(4,000~5,000원)임에도 뷔페식이었고, 고기반찬 여러 종류를 제공하였다. 심지어 콜라와 아이스크림까지 있었다. 물론 질 좋은 식재료는 아니었겠지만, 겨우 그 가격에 그 정도로 풍성하게 나온다니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외에도 돈까스, 컵밥 등 식당의 종류는 많았는데, 하나같이 양이 많고 가격이 착했다.
고시원도 좋았다. 부산에서 지내던 고시원과 가격은 비슷한데, 방은 2.5배 정도 넓고 개인 화장실도 있었다. 원룸이 부럽지 않은 정도였다. PC방도 저렴했는데, 1시간에 500원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는 기본 1,000~1,200원 이상인데(그렇다고 내가 PC방에서 살았다는 건 정말 아니다. 3주간 지내며 두 번 정도 갔다. 진짜다...)!
어쩌면 신림동에서 지내나, 부산 대학 앞에서 지내나 지출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부산에 있을 때도 고시원에서 잠을 자고, 학식을 사 먹었는데. 그럼 그게 그거 아닌지?
길거리는 대체로 한산했다. 다들 보통 학원이나 스터디카페에 있느라 그런 것 같았다. 대신 가끔 길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젊었다. 그리고 츄리닝 차림의 사람들이 많았다. 신림동에서 꾸미고 다닐 이유는 크지 않아서인 듯했다. 나도 여기서 아무렇게나 입고 다녔다(사실 난 원래 그러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신림동에서는 다른 곳에서 느끼기 어려운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여기엔 분명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같이 꿈과 미래를 찾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면 분위기가 밝고 희망차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무언가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였다. 왜 그런 걸까?
나의 신림동 생활은 단순했다.
우선 아침 일찍 일어나 스터디카페에 갔다(늦잠 자는 습관을 꼭 고쳐야만 했다!). 정말 일찍 일어나면 아침부터 고시식당을 가기도 했다.
그러고는 노트북을 펼치고 면접 준비를 시작했다. 정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최신 정책을 공부하거나, 업무 계획을 보기도 했다. 문득 옆에 있는 다른 수험생들이 뭘 공부하는지 궁금해졌다. 복도를 지나가는 척하며 문제집을 봤다. PSAT(행정고시 1차 시험)을 푸는 수험생도, CPA를 준비하는 수험생도 있었다.
그렇게 오전 내내 공부하다, 점심에 근처 식당에 들어간다. 나는 보통 고시식당을 가고는 했다. 가성비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문구점에 가기도 했다. 면접 준비품을 사려고 하니, 사장님이 나에게 2차 시험을 붙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나를 크게 격려하셨다. 꼭 최종합격하라고.
덕분에 에너지를 얻고는 다시 오후에 공부를 했다. 그러고 저녁을 먹고는, 약속한 근처 스터디룸에 가서 스터디원들과 면접스터디를 했다.
이것이 매일 반복되었다. 아, 일주일에 1~2번은 여기서 면접학원 일정이 추가되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겹지 않았다. 겨우 3주밖에 지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면접 준비가 처음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신림동 생활이 나에게는 꽤 잘 맞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면접 기간이 짧아서 신림동에 1달도 채 있지 못했다. 시험을 치고도 좀 더 있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돈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신림동의 ‘맛집탐방’도 하지 못하고,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다. 정말 딱 할 것만 하고 돌아온 느낌이다. 그래서 지금도 신림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지낸 소감이 어떻냐고? 조용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 때문인지,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효율적이기도 했고, 나름 편했다. 신림동 특유의 무언가 가라앉은 분위기도 상관없었다. 분명 햇빛이 비치는데도 무언가 어두운 그림자가 깔린 그 풍경도 견딜 만했다.
그럼 오래 있을 곳이냐고? 다른 사람에게도 추천하냐고?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