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 수능 성적순으로 대학이 결정되는 입시 전형이다. 누구나 같은 시험을 치르며, 성적도 논란 없이 정직하게 나온다. 그러니 ‘공정’ 측면에서는 이보다 좋은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 거기에 수능 문제의 질도 매우 높고, 혹여나 외부로 유출되는 일도 사실상 없으므로 신뢰성도 굉장히 좋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정시 전형의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다. 실제로, 2026학년도 정시 모집 비율은 고작 20.1%에 불과하다. 반면 수능 성적 외에도 내신, 논술, 학생부종합평가, 면접 등 다양한 요소가 반영되는 수시 전형의 비중은 무려 79.9%나 된다.
수시 비중이 이토록 높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수능 한 방으로 대학이 결정되는 것의 불합리함’은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학생 A가 있다. A는 어릴 적 외국 어학연수를 다녀와 일찍이 영어를 마스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과목별로 고급 과외 강사가 붙어 정성껏 가르쳐준다. 반면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 수업과 무료 인터넷 강의에만 의존하는 학생 B가 있다. 만약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수능 성적을 잘 받는데 누가 더 유리할까?
여기서, ‘수능 성적순으로 대학 서열이 결정되는 것이 정당한지’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이 등장한다. 그리고 수시 전형은 이를 상당 부분 해소해 준다. ‘평등’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수시가 완벽하냐면, 결코 그렇지 않다. A와 B의 사례는 사실 극단적인 예시이며, 실제로는 학생들의 ‘출발선’ 위치가 누구에게 유리한지 정량적으로 따지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심지어 수시 전형 하에서는, ‘내가 수능을 더 잘 쳤는데, 나보다 성적이 낮은 애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오히려 더 좋은 학교를 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는 공정이라는 가치에 있어 치명적이다.
공정과 평등이 충돌하는 건 대입 분야에서만이 아니다. 공무원 시험에서는 합격자의 성별이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면, 반대 성별 몇 명을 추가 합격시키는 ‘양성평등’ 제도가 존재한다. 이 또한 ‘합격은 성적순’이라는 대원칙을 위배한다. 시험 외적으로도 얼마든지 있다. 장애인 주차구역, 최저임금제를 비롯한 각종 복지가 그 예시이다.
공정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능력·노력 차이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성과가 다른데 보상이 같으면 그거야말로 정의에 어긋나며, 국가는 공정한 경쟁 환경만 보장하면 된다고 말한다. 만약 모든 결과를 동일하게 만들어버리면, 대체 누가 열심히 하겠는가?
반면 평등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애당초 출발선 자체가 다름을 강조한다. 또한 사회 전체의 조화를 중시하며, 개인의 성공도 일부는 사회 덕분임을 주장한다.
공정 vs 평등. 이렇게 둘은 종종 충돌한다. 대체 어디까지가 공정이고, 어디부터가 구조적 불평등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공정’을 더 중시한다.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은 너무나 주관적이며, (특히 성인의 경우) 환경이 다르더라도 어느 정도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결과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경쟁이 유지된다고 본다.
그런데...
행정고시에는 ‘지방인재’ 제도가 있다. 합격 커트라인보다 성적이 낮더라도, 그 응시생이 지방대(비수도권 소재 대학)를 나온 경우 일정 점수 범위 내에서 추가로 합격시켜 주는 제도이다.
예를 들어보자. 2차 시험의 합격 커트라인이 70점이다. 이때, 지방대를 졸업한 응시생 C의 성적은 아쉽게도 69점이다. 또 다른 응시생 D는 수도권 소재 대학을 졸업하였고, 그 또한 69점이다.
이 경우, 원래 2차 합격자 중 지방대 합격자의 숫자가 충분히 적다면, 지방대 C는 구제된다. 2차 시험에 추가 합격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D는 해당사항이 없다. 얄짤 없이 그대로 불합격하게 된다.
지방인재의 위력은 ‘압도적’이다. 보정 점수가 매우 후하기 때문이다. 2차 시험의 경우 무려 2점의 범위에서 (원래는 불합격했어야 할) 지방대 응시생들을 추가합격 시켜준다. 2점이 얼마나 큰 거냐고? 합격 커트라인에서 소수점(1점 이내) 차이로 떨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면접(3차 시험)에서도 지방인재는 건재하다. 원래라면, 면접 성적이 동일한 경우 2차 시험 성적 순대로 합격하게 된다. 그러니 면접을 어느 정도 잘 보더라도 떨어질 수 있다. 반면 지방대 응시생은? ‘면접을 망치지만 않는다면 무조건 합격’이다. 이는 엄청난 이점이다. 면접 준비를 안 한 것이 아니라면, 면접을 저 정도로 망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산대를 졸업한 나는 지방인재에 해당하였다.
마지막 해 시험. 우리 직렬(기계직)에서는 15명이 2차 합격을 했다. 만약 15명 중 지방대 출신이 충분히 적다면, 나는 지방인재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신림동 스터디카페에서 면접을 준비하던 어느 날. 실장 형에게서 카톡이 왔다.
15명 중 지방대는 나 혼자였다.
그러니 나는 면접을 망치지만 않는다면 100% 합격이었다.
그걸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관련 규정집을 몇 번이고 읽으며 그 사실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찔렸다.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터디를 할 때면, 내가 지방인재라는 사실을 숨겼다. 다들 목숨 걸고 면접을 준비한다. 그런 스터디원들이, ‘쟤는 평타만 쳐도 붙는다더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큰 박탈감을 느낄까?
그러나 스터디원 중 한 명은 알고 있었다. 내가 지방인재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ㅇㅇ님은 면접을 아주 못 본 것만 아니면 붙잖아요.”
처음에 나는 모르는 척했다. 괜히 미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들통나고야 말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지방인재 믿고 대충 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불편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좀 더 당당해지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지방인재 덕분에’ 합격할 수 있었다.
최종합격 후 다음날. 합격자끼리 단톡방을 판 뒤 2차 성적을 비교하였다. 합격자는 총 14명. 그리고 내 2차 성적은 14등, 즉 꼴찌였다.
원래라면 최종 합격자는 14명이 아닌 12명이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지방인재로 붙는 바람에, 합격자의 숫자는 늘어났다(참고로 13등은 비슷한 제도인 ‘양성평등’으로 합격). 추가 합격을 한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원래 나는 평등보다는 공정을 더 중시했다. 내가 대상자이면서도, 지방인재 제도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성적순으로 합격자를 선발한다는 대원칙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서울권 대학 응시생 입장에서는 충분히 역차별을 느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정작 수혜자가 되어버렸다. 혼란스러웠다. 만약 지방인재가 아니었더라면, 그 해 나는 면접에서 탈락하고, 수험생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 어떻게 되었을까? 빨라도 1~2년 뒤에야 붙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공부를 하고 있거나, 다른 직장을 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좀 더 당당하게 지방인재 없이 붙었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사실은 매우 감사한 일이다.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또 개인적으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 나는 14등에 79.33점으로서 지방인재로 합격하였다. 한편 15등 응시생의 성적은 79.23점이었고, 지방인재가 아니었기에 불합격하였다. 어쨌든 성적 또한 내가 조금 더 앞섰다.
그런데 만약 내 점수가 더 낮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결과는 같다. 여전히 내가 합격하고, 그 응시생 분은 불합격한다. 지방인재 응시생은 구제되는 반면, 비지방인재 응시생은 컷 아래이면 자비 없이 탈락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성적이 더 높은 사람이 오히려 떨어지고, 낮은 사람이 붙는 이상한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그럼 그분은 대체 얼마나 억울할까? 그나마 내가 0.1점이나마 더 높았기에, 이런 경우가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이런 지방인재 제도는 필요할까? 대체 왜 있는 걸까?
(1) 찬성 측
지방균형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나라는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이 수도권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 전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거주하기도 한다. ‘제2의 도시’라는 그 부산도 고령화가 매우 심하다. 지하철 광고의 대부분은 병원 홍보가 차지하고, 한때 젊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시내 상권도 크게 약해졌다. 오죽하면 부산이 ‘노인과 바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
한 교수님은 나에게 ‘지방이 고사당하고 있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고 하시기도 했다. 이런 지방소멸은 당연하게도 국가의 미래에 큰 위협을 준다. 저출산을 비롯하여 사회의 병목 현상의 큰 원인을 차지하기에,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큰 과제이다. 그러니 지방인재를 등용하여 지방 소재 대학을 살리는 것은 정당하며,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방러로서 불편한 게 없지는 않았다. 행정고시는 최상위권 대학생들이 주로 준비한다. 그렇기에 부산에서는 행정고시 준비생 자체가 거의 없어서, 스터디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내 주변에는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나 또한 고시의 존재 자체를 모르다가, 군대에서 아주 우연히 알게 되었을 정도이다.
반면 서울권 대학에서는 행정고시가 주요 진로의 하나이기에, 비교적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다. 고시반의 자료 격차도 크고, 학교의 지원 정도도 하늘과 땅 차이이다. 기맥정에는 2차 자료는커녕 합격수기도 거의 없으며, 근처 절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 전부이다. 반면 수도권 소재 모 고시반은 다양한 자료와 합격수기는 물론이고, 1차 합격 시 100만 원의 장학금도 제공한다. 심지어 식당, 기숙사까지 갖추어져 있다. 이렇듯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인프라 측면에서 큰 차이가 난다.
게다가 2차 시험은 서울에서만 응시할 수 있기에, 매번 무거운 캐리어 2개를 끌고 상경해야만 했다. 5일 이상 숙소를 잡아야 해서 경제적 부담도 상당하였다. 면접 준비 또한 서울에서 해야 했다. 관련 스터디·학원 모두 서울에만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상경은 물론 1달을 보낼 숙소를 잡아야 했다.
지방대생에 대한 은근한 무시도 존재했다. 수도권 소재 대학 출신의 일부 수험생들은 ‘지방대 따리가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것’을 폄하하기도 하였다. 행정고시 카페의 익명 게시판에는 지방대생을 조롱하는 글이 이따금씩 업로드되었다. 심지어, 같은 지방대 학생끼리도 큰 차이는 없었다. ‘어떻게 네가 행정고시를 준비하냐’는 눈빛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방대생은 합격 숫자가 매우 적다. 우리 직렬 합격자 14명 중 지방대 출신은 나 혼자였다. 연수원 입소 후 같은 분임원 20명 중에서도, 조별과제팀 9명 중에서도, 같은 부처에 발령받은 동기 16명 중에서도 지방대 출신은 오직 나뿐이었다.
이렇듯 지방대 수험생에게 핸디캡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지방인재 제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2) 반대 측
실력 이외의 다른 요소가 개입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반대 측의 가장 크고 근본적인 논리이다.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수험생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얼마나 클까?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 카이스트와 포항공대를 제외한다면, ‘수능을 못 쳐서 서울권 대학에 가지 못하고 지방대를 간 것’이 사실상의 팩트이다. 그런데 지방대를 간 것이 오히려 가점이 된다? 이상하다. 더 세게 말하자면,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행정고시에서 가점을 받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게 정말 정당할까?
그렇기에 이 제도에 대한 수도권 대학 소재 응시생의 반발은 상당하다. 대놓고 지방인재 합격자들을 폄하하는 글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들이 틀렸을까?
나는 정말 붙을 자격이 있었을까? 합격해도 되었던 걸까?
지방인재 제도는 필요할까? 정당할까?
지방인재로 붙은 나를 보고, 수도권 대학 소재 합격자들은 속으로 뭐라고 생각할까?
이 글을 쓰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사실 예전에는 내가 지방인재로 붙었다는 사실을 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드러내기로 했다. 설사 이 제도가 불합리하다 할지라도, ‘공정과 평등’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데 내가 기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지방인재의 또 다른 취지일지도 모른다.
“제도 있는 거 활용하는 건데 뭐 어때요?”
괜히 미안해하는 나에게 스터디원이 말했다.
나는 지방인재로 합격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예전처럼 ‘공정’만을 주장하기는 어려워졌다.
내게 주어진 이 기회를 잘 활용하겠다. 그건 나의 책무이기도 하다. 공정을 중시하면서도 평등의 수혜를 본 자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