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칠기삼”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의 성패는 운이 7할, 실력이 3할만큼 작용한다는 뜻이다. 즉 세상에 실력만으로 되는 일은 없으며, 오히려 그보다 운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노력이 폄하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라는 말도 있듯이, 실력이 없으면 운도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이루려면 실력만으로는 부족하고, 운도 상당히 따라야 한다.
나는 마지막 3차 시험을 통과하였고, 이것으로 행정고시를 합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잘해서 붙은 걸까? 아니면 사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운이 억세게 좋아 합격한 것일까?
우선 ‘기’ 측면에서 내가 합격할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해 보았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이다.
□ 잘한 것
ㅇ (늦잠 자서 그런지는 몰라도) 체력이 괜찮았다. 3년 이상 공부하면서 아픈 적이 거의 없었고, 덕분에 갑자기 감기 걸려서 공부 패턴이 망가지는 일도 없었다.
ㅇ (마찬가지로 늦잠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집중력이 꽤 좋았던 것 같다. 한 번 자리에 앉으면 몇 시간이 훅훅 지나가 있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거의 쉬지를 않았다. 오직 점심·저녁 먹는 시간, 커피 사러 가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만이 휴식의 전부였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공부하는데 활용하였다.
ㅇ 그 외에도 공부 과목이 적성에 잘 맞았다. 덕분에 개념을 깊게 파헤치는 것, 몇 시간씩 집중하여 기출문제를 푸는 것 모두 생각보다 할 만했다(물론 문제지 놔두고 몇 번 도망간 적도 있다).
당연히 못한 것도 너무 많다. 수험생이 평균 10~13시에 일어나는 말이 안 되는 수준의 늦잠, 온갖 창의적인 유형의 실수, 과목 간 시간 분배의 실패 등등... 하지만 여기서는 ‘최종합격’에 대한 기를 다루는 것이 목적이므로, 더 자세히 쓰지는 않겠다.
이번에는 ‘운’ 측면을 보겠다. 마지막 세 번째 해에 붙었으니, 그 해에 내가 맞이한 행운을 분석하였다. 사실 이거야말로 결정타이다.
□ 1차 시험
ㅇ 첫 번째 과목 정말 망한 줄 알았다. 솔직히 50점도 예상했었다. 그런데 막상 매겨보니 생각보다 잘 나왔다. 긴가민가 하면서 푼 문제들, ‘에라 모르겠다’ 했던 어려운 문제들 상당수가 정답으로 채점되었다. 그렇게 70점이라는 생각보다 높은 점수를 받으며 1차 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 2차 시험
ㅇ 첫 번째 과목은 암기과목이었다. 범위가 방대하여 어떤 문제가 나올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날은 전부 내가 아는 문제만 나왔다. 심지어 구석에서 나온 지엽적인 문제들도 내가 공부한 범위에 속했다.
ㅇ 두 번째 과목은 난이도가 쉬웠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무려 2개 문제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했었다. 다행히 이를 발견하였고, 결국 이 과목은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ㅇ 2차 시험을 치르기 전, 세 번째 과목과 관련된 새로운 전공 서적을 기맥정 자금으로 구입했었다. 만약 지원금이 아니었더라면 구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책에 내가 생전 처음 보는 개념이 있었고, 곧바로 그걸 익혔다. 그리고 그 개념이 그대로 시험에 출제되었다.
ㅇ 네 번째 과목에서는 ‘모르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당연히 풀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그 문제의 개념도를 본 듯한 기억이 났다. 그리고 전혀 다른 유형의 문제에서 비슷한 개념을 구하는 방법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이를 조합하였고, 결국 기적적으로 문제를 푸는데 성공하였다. 시험 종료 6분 전이었다.
□ 공통
ㅇ 무엇보다 선발 인원이 많았다. 무려 12명이었는데, 그 전전해에는 10명, 그 전해에는 8명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정말 많은 것이었다.
ㅇ 최하위권으로 합격하였다. 최종합격자가 14명이었는데, 내가 14등이었다! 겨우 꼬리를 잡고 붙었다. 대단한 운이다.
* 방금 12명 선발한다 해놓고, 또 갑자기 최종합격자가 14명이라는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다다음 에피소드, ‘지방인재’에서 서술하겠다.
ㅇ 나는 지방인재에 해당하였다. 이것은 결정적인 행운이다.
* 마찬가지로 다다음 에피소드, ‘지방인재’에서 서술하겠다.
물론 기와 운이 칼을 베듯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둘은 혼재되어 있으며, 어디까지가 기이고 어디부터가 운인지 살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기’에서 언급한 ‘체력·집중력이 좋은 것’도 사실은 내가 잘했다기보다, 우연히 갖춘 신체적 형질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쩌면 ‘운’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공부 과목이 적성에 잘 맞은 것도 ‘기’가 아니라 ‘운’인 것 같기도 하다.
모르는 문제를 푼 것, 내가 공부한 부분 위주로 나온 것은 정말 큰 ‘운’이지만, ‘기’가 한 스푼도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닐 거다. 다른 유형의 문제를 몰랐더라면 정말 풀지 못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기’보다 더 중요한 건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운’이 없었으면 나는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행정고시 기술직 카페에서 알게 된 합격자와 카톡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눈앞에서 실수를 발견한 그날, 나는 그에게 상담을 요청했다(‘벼락’ 에피소드 참고).
“전 작년에 다들 맞는 것을 틀렸었어요 ㅎㅎ”
그가 카톡으로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바로 그 해 합격하였다.
“진인사대천명이죠! 그냥 다음 과목에 최대한 다 쓰시면 될 거예요 ㅎㅎ”
덕분에 나는 멘탈을 조금 추스를 수 있었다.
운이든 기든 상관없이 모두 내 손안에 넣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나의 바람이다. 마음 같아서는 ‘운이 0이더라도’ 이루어 낼 정도로 잘하고 싶다. 하지만 세상에는 분명 통제할 수 없는 변수도 존재한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되, 예상치 못할 ‘행운’과 ‘불운’까지도 미리 계산에 넣어두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