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준June이는 6월에 태어났다

07 이제 준이 차례, 사랑의 시작

by 코코

준이는 자라면서 할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장사하는 할머니 옆에 굳이 있을 필요가 없었으며 또 준이는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아주 좋은 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밖에 나가 달리기를 했고, 오는 길에는 꽃과 나무들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집에 돌아오면 찬물로 시원하게 샤워를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씻는 것에 익숙해서인지 또래 아이들과 달리 온몸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닦아냈다. 그리곤 할머니의 잔소리 없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 제법 요령이 생겨서 고들고들하게 면발도 신경을 썼고, 가끔씩 달걀도 두 개나 깨어 넣었다.


비가 내리는 날엔 빗소리가 라디오처럼 은은하게 들리게 창문을 조금 열어 놓고 하루종일 마루에 누워 책을 읽었다. 누군가 읽던 책이 대부분이었지만 할머니는 준이가 원하는 책들을 아낌없이 사주었다. 준이는 ‘변신이야기'를 좋아했는데 신화에는 늘 신의 형벌과 용서로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인물들이 가득했다. 준이도 그들처럼 변신을 꿈꾸었다. 어쩌면 그건 변신이 아니라 성장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돈을 잘 벌고 할머니를 호강시켜 드리는 사람, 세상 착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슬픔과 외로움에도 울지 않는 사람...... 그 정도였지 준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웅을 생각하진 않았다.


키프로스의 피그말리온, 아프로디테의 형벌로 수치심을 잃어버리고 저 나그네들에게 몸을 파는 한 없이 천박해져 버린 섬의 여인들. 문란한 그들을 멀리하며 고독한 삶을 살았던 사람. 현실을 외면한 채 흰 눈처럼 하얀 상아에 순결한 여인을 조각했던 사내. 간절한 기도로 그토록 사랑했던 조각상을 기어이 인간 갈라테이아로 변신시킨 사랑의 개척자 피그말리온.


준이는 또 피그말리온 같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사랑과 믿음을 준다면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마에 대한 의문과 원망, 애증...... 이런 뒤엉킨 감정의 혼란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 상상했다. 부디 신의 가호가 준이와 함께 하길.


준이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천천히 준이의 가슴속에서 이성에 대한 관심이 피어올랐다. 사랑이 움트고 있었다. 준이는 아프로디테가 피그말리온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 앞으로 사랑을 데려다줄 것을 또 바랐다.


"아이고, 준이 머리 좀 잘라야겠다. 할미도 오랜만에 파마도 하고." 머리 자르는 걸 싫어했지만 선뜻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할머니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파마를 했는데 여느 시장 사람들처럼 컬이 오래 가게 바글바글하게 머리를 말지 않았다. 누구한테 젊게 보일 필요가 없다며 염색은 하지 않았지만 반찬을 만드는 사람 머리가 지저분하거나 정리가 안되면 장사가 되겠냐며 늘 머리에 신경을 썼다. 할머니가 머리를 하고 온 날엔 준이는 하이얀 백합이나 목련 같다며 할머니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할머니와 준이는 시장이 아니라 시내에 있는 제법 큰 미용실을 다녔다. 시장 아주머니들은 대부분 시장 상가에서만 머리를 했고 파마를 한 채로 수건을 뒤집어쓰고 장사를 했지만 할머니는 머리 하는 날 가게 문을 닫았다.


그 미용실엔 옆집 아주머니의 딸 진희가 미용사로 일을 하고 있었다. 진희는 고교시절 방황 끝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용 기술을 배웠는데 제법 솜씨가 있어 서울에서 한동안 일을 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두 해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예전보다 훨씬 세련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얼굴은 투명하게 반짝였고 눈은 크고 선명해졌으며 콧날은 날카롭지만 예쁘게 솟아올라 있었다. 준이는 진희를 볼 때마다 할머니가 틀어놓은 TV 뉴스의 아나운서 같다고 생각을 했다.


할머니와 옆집 아주머니는 나이가 10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진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엔 서로를 의지하는 삶의 동반자가 되어버렸다. 할머니는 시장이 쉬는 날이면 전날 꼭 옆집 아주머니와 밤늦게까지 소주잔을 기울였고 다음날이면 12시가 넘도록 늦잠을 잤다. 집에 가는 길에 순대며, 족발이며 하는 안줏거리를 푸짐하게 샀다. 준이도 할머니를 따라 옆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들을 먹었는데 진희도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한동안 함께했다. 진희도 가끔씩 못 이기는 척 소주를 마셨는데 그런 날이면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시장에서 듣던 것들과는 다른 잔잔한 사랑 노래였다. ‘얼마큼 더 살아야 그대를 잊을 수 있나,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사랑이다' 이런 가사였는데 진희의 노래를 들으면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연신 눈물을 닦았고 마지막에는 진희마저도 안 보이게 눈물을 흘렸다.


진희는 두 사람이 잔뜩 취해 목소리가 커지면 조용히 마당에 나가 담배를 피웠다. 그 모습을 준이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준이는 크면 담배 피우면 안 된다." 하며 머리를 쓰윽 문질렀다. 준이는 진희의 마음을 읽었다.


"진희 누나, 너무 힘들어하지 마. 그건 절대 사랑이 아니었어. 그 사람이 누나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 누나 마음에 남겨 놓은 상처들이 너무 아프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은 없어. 누나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난 알고 있어. 이제 기억을 지워. 나쁜 일은 절대 추억이 되지 않아."


"어머, 아주머니 오늘은 준이랑 같이 오셨네요? “ 동네에서 볼 때도 그랬지만 미용실에서 진희의 목소리엔 더 생기가 돌았다. 사각사각 경쾌하게 가위질을 할 때마다 할머니의 하얀 머리칼이 벚꽃잎처럼 휘날렸다. 손재주가 좋아서인지 순식간에 할머니 머리 전체를 한 땀씩 롯드에 말아 고무줄로 단단히 묶었다.


“이제 준이 차례!” 진희는 준이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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