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준June이는 6월에 태어났다

09 가스등 gaslight

by 코코

런던에서는 주로 집 조명으로 가스등을 썼다. 서로 연결된 파이프를 통해 가스를 받아 집안을 밝혔는데 한 방을 밝게 하면 자연스레 다른 방의 가스등은 흐릿해져만 간다. 사랑도 어느 한쪽이 밝아지면 다른 한쪽은 어두워지게 된다. 가스등처럼 사랑은 한쪽의 자아가 강해지면 다른 자아는 점점 약해지게 마련이다. 밝음을 강요하면 빛을 잃게 되고 의심의 발자국 소리는 점점 커지게 된다. 마치 영화 가스등Gaslight의 폴라와 그레고리처럼.


진희는 서울에 온 2년 동안 매일매일 미용실에서 누군가의 머리를 감겼다. 그리고 나선 그 머리를 말렸다. 집에 돌아오면 손은 퉁퉁 부어 있고, 드라이기 소리가 웅웅 거리며 잠들기 전까지 귀를 맴돌았다. 매일밤 10시쯤엔 삼각 김밥과 바나나 우유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더 이상 바나나 우유가 맛이 없게 되었을 때 진희는 디자이너 명찰을 달고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었다. 점차 자신을 찾는 고객들이 많아지자 옷차림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화장하는 것도 나날이 익숙해져만 갔다. 그리고 모아 둔 돈으로 눈과 코를 성형했다. 큰 눈을 더 크게, 콧대를 더 높게. 그리고 SNS를 시작하며 사람들과 소통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진희를 불렀고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진희가 고시원을 벗어나 빌라 2층 원룸을 얻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그였다. 그 남자는 진희에게 보증금 2,000만 원을 선뜻 내어주었다. 원룸에서의 첫날밤 백화점에서 산 파란색 넥타이를 그에게 매어주었다. 그날도 그가 좋아하는 하얀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진희는 직업 상 검은색 옷을 주로 입었음에도 옷장에는 점점 흰색이 많아져만 갔다. 긴 머리도 그가 좋아하는 단발로 잘라냈다. 빨간 립스틱은 바르지 않았으며 탄탄한 몸을 만들기 위해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꼭 밤운동을 나갔다.


그가 오지 않는 날이면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를 들었다. 혼자 하얀 옷을 입고 이소라가 부르는, 김동률이 부르는 이 노래를 한 번씩 들었다. 이 노래는 원래스무 살의 김동률이 만들었는데 너무나 아끼는 노래지만 부르기가 어려워 20년 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이소라에게 보냈다는 사연이 있다. 누굴 위해 만든 노래가 아니라 순수했던 나날의 감성으로 써 내려갔던 노래. 남자의 노래는 너무나 따뜻하고 깊은 위로로 들려왔고 여자가 부르는 노래를 들을 때는 헛헛함에 눈물을 흘렸다. 노래를 들으며 진희는 이성보다는 감정에 깊게 깊게 빠져들었다.


"조금만 기다려. 너에게 돌아올 거야." 그는 결혼한 남자였다.


늘 "다시 올게." 하며 떠났다가 온다는 말없이 진희를 찾아왔다. 진희는 노랫말처럼 그 사람의 두 손을 놓으면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그립다 보채지도 않았고, 보고 싶다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기가 태어났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새벽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의 목소리엔 슬픔과 기쁨이 뒤엉켜있었다. 진희는 이제 추운 겨울날 버스정거장에 나가 막차까지 그를 기다리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 없이 혼자 길을 걷기로 했다.


진희는 서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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