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의 공명과 좋은 삶
독일의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의 책 소외와 가속(Beschleunigung und Entfremdung)을 한국어로 다시 읽고 있다. 이 책에서 로자는 “좋은 삶”에 대해 탐구하며, 우리가 진정으로 삶의 의미와 만족을 찾기 위해선 소외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한다. 그는 단순히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대신, “소외되지 않는 삶이란 무엇인가?”로 질문을 바꾸어 좋은 삶의 개념에 접근한다. 다만 로자는 소외된 삶을 근절하는 방식을 경계하며, 전체주의적 이론이나 정책이 아닌 소외의 순간을 벗어나는 경험을 통해 삶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하며 그 순간을 “공명”이라고 표현한다.
로자에 따르면, 현대인의 삶은 지나치게 빨라지며 우리와 세상 사이의 진정한 상호작용이 단절되는 소외를 낳는다고 말한다. 2005년에 발간된 시점과 비교해 2024년 지금, 기술과 속도가 더욱 빨라진 가운데 우리는 효율과 소비에 익숙해져 있지만, 오히려 삶의 깊이와 의미를 찾는 경험은 더욱 방해받고 있다. 로자는 이러한 속도 경쟁에서 벗어나 삶의 대상과 진정으로 연결되는 순간, 즉 “공명”을 통해 세상과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명은 단순히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대상과 깊이 교감하고 나 자신이 변화하는 경험을 포함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적 세계와의 반응 속에서 나와 세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울림을 만들어내는 관계를 뜻하며, 공명을 경험한 개인은 자기 효능감을 느끼고 “좋은 삶”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특히 공명은 공간의 환경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관련하여 극장은 공명의 경험을 제공하는 특별한 장소다. 어두운 조명과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그리고 함께 숨죽이며 감정을 나누는 관객의 존재가 결합된 극장은 깊이 몰입하고 감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낸다. 이는 단순히 콘텐츠를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마음의 울림이 한데 모여 감정의 파동을 일으키는 "공명"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예술을 통해 관객에게 공명의 순간을 선사하는 것이야말로 극장 문화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는 관객과 예술가 사이에서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문화경영자의 역할 또한 필수적이다. 그러나 극장이나 문화교육기관이 단순히 체험적 자극에만 집중한다면 지속 가능한 문화적 역할은 퇴색될 수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러므로 기관들은 공동체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촉진하고,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개방성을 갖추어야 한다.
로자는 자신의 연구를 “좋은 삶의 사회학에 대한 기여”로 여기며,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최근 새로운 비판 이론을 제시한다. 그는 사회적 위기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으로 무조건적 기본소득과 포괄적 상속세 같은 방안을 제안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논의는 다소 앞서나간 감이 있지만, 문화적 접근에서는 시사점이 있다. 예컨대 무조건적인 기본 문화 제공을 통해 모든 시민이 예술과 공명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문화예술계는 대개 다양하고 새로운 콘텐츠 제공에 강박을 느낀다. 이는 구조적 문제를 동반한 재정적 지속성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본다. 많은 재단과 문화기관이 정부 및 지역 공모사업, 자체 기획사업, 1회성 대형 이벤트, 외주업체와의 협력 등을 통해 운영되는 실정이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안정적인 예술 활동을 이어가는 데 어려움이 크다. 자리 잡은 예술단체조차도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 사회는 로자가 말한 “좋은 삶”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공명 경험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지역사회에서 지속 가능한 문화기관의 역할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야 한다.
이미 한국의 문화예산도 독일과 견주어 부족하지 않게 편성되어 있는 만큼 그 사용 방식을 재검토하여, 문화적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사회적으로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제공하는 중요한 문화예술 공간인 제작극장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