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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오두막집에 살고 있습니다
12화
8. 제주에서 독서모임
잡지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멋진 젊은이들을 만났다
by
유랑
Oct 15. 2023
토요일 오후, 서귀포 게우지코지 카페에서 독서모임 친구들을 만났다.
툭 튀어나온 해안도로에 있어서 새파랗게 반짝거리는 여름 바다와 현무암에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풍경이 멋졌다.
‘게우’는 제주 방언으로 전복 내장이고 ‘코지’는 ‘곶’이다.
뭔가 먹음직스럽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멋진 작명 센스에 감탄하다가 파도가 밀려오는 멋진 풍경을 보노라면 그냥 또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머리가 텅 비어갔다.
바다멍이란 게 이런 거구만!
삼십 대 지인 두 명은 청소년기에 축구선수였던 청년 사업가와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마케터였다.
제주에서는 잡지 화보처럼 근사한 풍경을 마주치고 가끔 놀라서 눈을 껌뻑거리곤 하는데 사람들 또한 느닷없이 아주 멋진 이들을 만나곤 한다.
우리가 함께 읽는 책은 주인공이 태양에너지를 앗아가는 외계 생명체와 대결하는 SF 소설이었다.
디스토피아의 불안감은 인간에게 내장된 칩 같은 걸까. 나야 원래 그런 취향이지만 발랄하고 건강한 젊은이들도 이런 책을 재미있어하는 게 신기했다.
SF 소설에 빠져들다 보면 마치 꿈에서 겪은 일을 소설로 읽는 것 같다며 신나게 책수다를 떨었다.
남들 뒷담화나 피곤한 신세타령이 아니라 서로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영화를 보는지 터놓고 취향을 나누면 오래전부터 친구였던 것처럼 친밀감을 느꼈다.
제주에 내려와 혼자 살면서 기존의 인간관계는 다 끊어지고 새로운 인연들이 소소하게 생겼는데 독서모임 사람들이 가장 편했다. 나이나 성별보다는 독서 취향이 대화에 있어서 더 중요했고 한참 떠들다 보면 각자 반짝반짝 빛나는 아우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커피 마시면서 바다도 실컷 보고 떠들고 난 후에 청년 사업가는 이웃집 부부와 정원 파티를 하기로 약속했다며 돌아갔다.
나는 마케터에게 서귀포 인도풍 레스토랑과 그리스 요리 전문점 두 군데 중 어디로 가고 싶냐며 저녁 메뉴를 골라보라고 했다.
그리스에서 일 년간 살았었고 은퇴 후에는 아테네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게 꿈이라는 마케터는 그리스 식당을 골랐다.
빈티지하게 꾸며놓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수블라끼와 차지키, 링귀니 스파게티, 전복 수프, 제주 보말 라이스를 천천히 맛보았다.
마케터가 지적하길 차지키라는 기본 소스가 완전 그리스식은 아니고 그리스 음식을 흉내 낸 한국 요리일 뿐이라고 했지만 서울에서 먹었던 그리스 음식보단 낫다는 총평이었다.
음식량이 어째 푸짐하다 싶더니 식사 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나왔다. 이유는 주문이 잘못 들어가서 요리 한 가지가 더 나왔기 때문. 근데도 별로 짜증이 안 났다.
왜냐하면 그리스까지 안 가고도 서귀포에서 편하게 그리스식 요리를 실컷 먹었으니까.
나는 밤 산책을 하러 법환포구로 가자고 마케터를 졸랐다.
그녀는 쿨하게 동의했다. 진정 여행을 사랑하는 이답게, 일요일엔 쉬어야 하고 제주시까지 가려면 한라산을 넘어가야 하지만 즐길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스마트함이 그녀에겐 있었다.
둘이서 편의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법환포구에서 막숙물까지 걸어갔다.
용천수를 가둬놓은 곳에는 여름밤 피서 나온 아이들이 우글거렸다.
내가 샌들 신은 맨발로 맑고 차가운 용천수에서 찰박거리는 동안, 운동화에 양말까지 신고 온 마케터는 두 눈만 껌뻑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제주 화산암반 아래에 삼사 십 년간이나 머물렀던 차가운 용천수를 꼭 경험해봐야 한다고 꼬드겼다. ‘만족’이란 찰 만자, 발 족자라며는 내 설명에 그녀는 이내 양말을 벗고 수정처럼 맑은 용천수에 엄지발가락을 들이밀었다.
악, 차가워!
밤 아홉 시 오두막집엔 별들만 총총한데 주차장을 지나 카페느
슨 앞에 차를 세웠다.
그 전날 토요일엔 해변 정자에서 피크닉을 하느라 한나절 포구에 차를 세워뒀더니 유리창마다 바닷물이 튀어서 부옇게 흐렸다. 내 낡은 차도 끈적끈적 불편했을 텐데, 카페 영업이 끝날 때까지 미뤄둔 거였다.
차 주위를 빙 돌아가며 물을 뿌리자 실내등을 켠 빨강색 SUV가 반짝반짝 빛났다.
시원한 민물로 샤워한 내 차도 기분 좋아 보였다.
나는 오두막집에서 SF 소설을 읽다가 햇볕 냄새가 풍기는 차렵이불을 둘둘 감고 잠들었다.
디스토피아 세상을 달리는 설국열차에 올라탄 승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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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6-2. 네 오두막집을 그냥 사지 그래?
11
7. 제주카펜터와 카페느슨
12
8. 제주에서 독서모임
13
9-1. 제주에서 일자리 구하기
14
9-2.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면 하기 싫어지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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