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면 하기 싫어지는 마법

11. 제주에서 먹고살기

by 유랑

독서모임에서 만난 마케터는 아주 근사한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주었다.

그녀가 다니는 회사의 공식 블로그를 쓰는 일이었다.


기존에 전담하던 직원이 사직한 이후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주력 채널은 전담 직원이 있지만 블로그는 몇 달째 방치 중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직원을 새로 뽑는 것도 여의치 않아서 외주를 주려고 하는데 한번 해 보겠냐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개인 블로그를 써왔기 때문에 기업 블로그 쓰는 일은 땅 짚고 헤엄치는 일로 보였다.

블로그 쓰고 원고료도 받는다니 감지덕지했다.


마케터는 일단 샘플 블로그를 보내달라고 했다. 어느 정도로 블로그를 잘 쓸 수 있는지 내부에서 보고 협의하는 모양이었다.


새로운 일거리에 대해 설레기도 하고 기대도 됐다.

기존에 직원이 작성했던 블로그를 보면서 그보다는 더 잘 써야 할 텐데 걱정도 됐다.


회사 홍보 블로그는 ‘회사 뉴스’나 ‘이벤트’를 알리는 채널이었지만 구독자가 좋아할 만한 읽을거리도 꾸준히 제공해야 했다. 제주도 관광지나 지역 축제 또는 맛집이나 카페 등도 괜찮은 주제였다.


비 오는 날 노트북을 들고 도서관에 갔다.

일단 회사 뉴스 한 건을 기존 블로그와 비슷하게 따라 써봤다. 그 다음에는 뭘 쓸까 하다가 그 도서관을 소개하는 블로그를 쓰기 시작했다.

통창으로 초록초록한 공원 전망이 시원하고 방금 먹었던 구내식당 메밀면도 정갈하고 맛있으며 묵직한 고동색 서가 사이를 거닐면서 읽고 싶은 책 고르기 좋은 곳이라고.


그런데 제주도까지 와서 도서관에 가고 싶은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고개를 기우뚱거리다가 휴대폰 사진 앨범을 뒤졌다. 최근에 다녀온 오름 사진은 분화구에 호수처럼 고인 물이 찰랑거리는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즐거웠던 기억이 막 떠오르면서 글이 술술 써졌다.


회사 공식 블로그의 사진에는 워터마크도 있던데 나는 그런 건 할 줄 몰랐다.

블로그를 외주로 전담하는 프리랜서라면 그런 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다음날 인터넷을 뒤져서 블로그 에디터 툴로 사진에 모자이크 처리를 하거나 워터마크를 삽입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나는 프로그램이라면 눈앞이 하얘지는 문과형이다. 어렵고 짜증 나고 하기 싫고 힘들어서 바로 포기하고 싶었다.

‘이거 안 해도 사는 데 지장 없지만, 심심하니까 새로운 걸 해 본다’라고 주문을 만들어 읊으며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을 달랬다.


마케터는 내부에서 ‘합격’ 했다며 일단 한 달만 계약하기로 했다고 알려왔다.

그 말인즉슨 제대로 못 해내면 한 달 후 자른다는 거였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내 쪽에서 하기 싫어질 수도 있으니까.

마케터는 은밀한 후일담도 알려주었다.

나 외에도 다른 후보들이 몇 명 더 있었는데 화려한 호텔이나 맛집을 능수능란하게 써온 블로거들보다 알려지지 않은 오름을 소개한 순수한(!) 내 글이 대표님 마음에 더 들었다는 거였다.


한 달 동안 블로그 열서너 편을 썼다.

회사에서 오더를 주는 뉴스, 이벤트 블로그들과 내가 직접 취재해서 작성한 블로그를 포함해서였다.


물빛 수국이 한창인 혼인지 소개와 독립서점 탐방, 저녁 산책에 대해 블로그를 썼다. 샘플 원고로 제출했던 오름 소개도 알차게 다시 써먹었다.


제주에 내려와서 일 년 동안 놀기만 했으니 노는 걸 소개하는 블로그는 잘 쓸 자신 있었는데 막상 해보니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았다.

가장 큰 난관은 내가 사진을 잘 못 찍는다는 거였다.

실제로 눈으로 보면서 기억에만 담으면 되지, 사진 찍는데 신경 쓰는 건 시간낭비로 여겼던 평소의 소신(?) 탓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다들 사진작가처럼 구도 잡고 보정도 하면서 사진을 찍는데 나는 기본적인 스마트폰 카메라 기능도 잘 쓸 줄 몰랐다. 휴대폰도 사 년째 써 온 구형이었다.

블로그는 사진이 중요한 매체인데 더욱이 기업체 공식 블로그라면 일기장처럼 대충 써도 되는 개인 블로그와는 달랐다.


홍보 채널을 담당하는 마케팅팀 막내 직원이 내 직속 상사가 되었다.

예술대학 졸업한 이십 대 청년은 사진의 ‘사’ 자도 모르는 프리랜서 때문에 미칠 노릇이었다.

짧은 이메일에서 상사(?)의 빡침이 느껴졌다. 그때마다 조마조마했다.


블로그 한 편 쓰는데 하루는 사진 찍고 글 쓰다가 보면 사진이 마음에 안 들어서 또 취재를 나가고, 며칠씩 걸렸다. 수백 장씩 찍어온 사진 중에서 고르는 것도 고역이었고, 잘 쓰려다 보니까 쓰려는 내용이 너무 방대해져서 어떤 걸 쓰고 뭘 빼야 할지도 헷갈렸다. 일주일 내내 쉴 새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 달을 꼬박 삽질만 하다가 잘릴 수는 없었으므로 한 달이 끝나갈 무렵 아이디어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다음 취재 계획부터 연간 아이템을 어떤 식으로 운영할지 성의껏 작성해서 메일로 보냈다. 사진을 더 잘 찍기 위해 관련 수업도 수강하기 시작했다고 알렸다.


노력하는 태도가 가상했는지 회사 측에서는 앞으로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계약은 무기한 연장하겠다고 알려왔다.

그 무렵 내 구형 휴대폰이 잔고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원고료로 받은 돈을 보태서 최신형 아이폰으로 갈아탔다. 담당 직원은 사진 퀄리티가 훨씬 좋아졌다며 기뻐했다.

팀장님의 지인이자 대표님께서 뽑은 프리랜서를 함부로 자르지도 못하는 이십 대 청년의 고충이 짠했다.

그 회사원 청년은 매일 놀면서 트래킹 하거나 낚시나 다니는 나를 너무나 부러워한다는데, 얼굴 본 적은 없지만 일을 잘해서 그를 기쁘게, 최소한 덜 힘들게 해주고 싶었다.


오후에는 또 블로그를 쓰러 나간다.

차를 몰고 가서 정원에 들어서는 첫인상과 휴양지 느낌이 물씬한 차양을 친 벤치들, 아이들이 노는 수영장과 그 너머로 보이는 서귀포 바다 풍경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찍을 예정이다.

그전에도 두 번이나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었지만 건질만한 게 몇 장 없었다. 오션뷰 전망과 음료 사진은 다시 찍어야 한다.


나는 경치 좋은 곳 나가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므로 사진 몇 장 찍고 원고 쓰는 거야 일도 아닐 거다.

그다음엔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를 끼얹은 썸머 라떼 사진을 찍고 그걸 마시면서 원고를 쓰면 된다. 수요일이 마감인데 화요일에도 친구들 만나서 놀아야 하므로 원고 세 꼭지 초안을 카페에서 다 해치워야지.


재택근무 일을 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일상에 리듬이 생겼다.

매주 수요일이 원고마감이므로 월, 화, 수는 되도록 일을 했다.

글이란 게 오래 묵히면서 고쳐 쓸수록 완성도가 높아지지만 끝도 없이 붙들고 늘어져서 되는 것도 아니므로 목요일은 쉬고 금, 토, 일 중 하루는 다음 주 원고의 초안을 작성해 놓았다.


주말에 실컷 놀다 와서 한밤중에 노트북을 켜고 원고를 쓸 때도 있었다. 대충 써놓고 나중에 잘 고쳐야지 하는 마음으로 마음 내킬 때 힘 빼고 쓰려고 노력했다.


여전히 나는 사진 찍는 게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날씨가 좋아야 사진이 잘 나오므로 일주일의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되도록 한 번에 취재를 마치려고 하고 평소 나가서 놀다가 찍은 사진들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도록 정리해 둔다.


주변 모든 이들이 나보다는 사진을 잘 찍기 때문에 나는 틈날 때마다 물어보고 배우느라 무척 바쁘다. 게다가 난생처음 써보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는 바로 그’ 아이폰에 적응하느라 노오력(!) 중이다.

소설가는 주변의 일상을 편집해서 스토리로 만드는 안목이 있는 이들인데, 사진작가는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에 저절로 손가락이 구도를 잡고 모드를 정해서 잡지 화보처럼 촬영하는 재능이 있는 이들인가 보았다.




독서모임 젊은 지인들에게 생활비가 충분하다면 일을 하겠냐고 물어봤더니 귀여운 젊은이들은 당연히 직장 때려치우고 놀기만 할 거라고 입을 모았다.

나이 든 꼰대인 나는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중에는 갈 데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어진다고 일하는 건 나름 중요하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 때려치우고 싶은 직장 다닐 때는 상상도 못 했지만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서 소소한 성취감을 맛보는 건 무척 중요하다.

일과 여가의 균형을 유지하는 게 언제나 마음대로 안 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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