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마법의 주문, 빨리 하고 놀자

9. 제주에서 먹고살기

by 유랑

뭐든지 금방 해치울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날엔 꽤 많은 일을 한다.


퀄리티가 떨어지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두뇌 회전도 빨라져서 돈벌이가 되는 일도 좀 한다.

밀린 집안일도 뚝딱 해치운다. 글도 꽤 많이 쓴다.


반면에 손가락 하나 꼼짝 못 할 것 같을 때도 있다.

나는 감정기복이 심한 편인데 그런 날은 여간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다.

우울감의 원인은 대체로 자기 연민 또는 자기 비하. 쓸데없는 감정들이다.




긴 장마 끝에 한여름 햇볕이 쨍하게 났다.

일어나서 마당에 이불을 내다 널고 손으로 일기를 썼다. 가벼운 에세이도 한 편 썼다.


가볍게 청소기를 돌리고 집을 나섰다.

화창할 때 사진을 찍고 재택근무 일하는 블로그 원고를 쓰려고 한다. 글 쓰는 일이라는 게 잘하려고 하면 더 안 되기 십상이고 한도 끝도 없이 붙들고만 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땐 마법의 주문을 외운다.


- 빨리하고 놀자! 어서 집에 가서 편안하게 소파에 파묻혀서 노닥거리면서 책을 읽고 일기를 쓰자. 돈 받고 하는 일은 그냥 받는 만큼만 하자!


그렇게 탁 놓아버리면 막혔던 일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일의 순서가 보이고 그걸 따라서 가다 보면 디테일에 조금 더 신경 쓰고 싶어 진다.


하루의 리듬이 생기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우주선에 줄을 맨 우주 비행사처럼 드넓은 우주를 유영하는 시간.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나서 한없이 가벼워지는 순간. 나를 옭아매고 있는 존재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지는 시간이다.


한 번 시동이 걸리면 일하는 동안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그다음엔 썩 잘하지는 못했지만 오늘 할 수 있는 만큼은 했다는 성취감이 찾아온다.


평소 나는 자존감이 낮아서 남들 눈치를 보느라, 욕먹기 싫어서, 싫은 소리 듣기 싫어서 마음의 소리를 억지로 외면하고 참다가 갑자기 빵 터져버렸다. 그게 바로 내가 제일 피하고 싶은 최악 중에 가장 최악이다.


해변에 나가서 원고에 쓸 사진을 찍는 동안 바닷새 몇 마리가 내 머리 위에서 해안을 가로질렀다.

바람을 타고 나는 새들은 무척이나 멋지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웬만큼 찍고 나서는 다시 원고를 쓴다. 새들처럼 장소를 옮겨가며 글을 쓴다. 하루에 서너 번, 어떤 날은 대여섯 번 다른 장소에서 쓴다.


집에서는 손으로 일기를 쓰고 카페에서는 노트북으로 쓰다가 원고를 블로그에 비공개로 올리고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고친다. 마음에 안 드는 글이 대부분이지만 계속 쓰다 보면 어째 잘 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오늘 밤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 쓰다가 문득 팔을 쭉 뻗고 기지개를 켜면서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했으면 좋겠다.


또다시 허공을 가르는 새들을 보면서 멍하니 생각한다.

지금은 너처럼 멋지게 못 날고 어설프게 파닥거리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 나도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거야.

새 모양의 헬륨가스 풍선처럼 뻥 터지지나 말라고 비웃듯, 하얀 새가 유려하게 난다.




파도는 밀려왔다가 저만치 물러가 버리고 나는 유한한 시간 속을 여행한다.

마냥 떠돌아다닐 뿐이지만 저 새들처럼 가능한 한 멋진 떠돌이가 되고 싶다.


가슴속에 파도가 밀려와서 물결로 가득 찬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채로, 내 의식이 무한히 확장되어 우주로 뻗어가서 엷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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