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의 전시, 책, 공연 보면서 시내 산책도 즐길 수 있는 곳
서귀포 시내에 위치한 기당미술관은
앞의 두 곳에 비해 접근성이 한결 좋은 곳입니다.
서귀포 시내에 숙소를 잡았다면 걸어갈 수도 있을 거예요. 미술관 규모도 크지 않기 때문에 전시 관람만 한다면 두어 시간이면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곳도 하루를 통째로 비워놓고 들러 보기를 바랍니다.
혼자 떠난 제주 미술관 여행에서라면, 기당미술관에 온 김에 미술관과 이웃한 곳에 있는 서귀포 예술의 전당과 삼매봉도서관까지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면서 방금 보았던 기당 변시지 화백의 작품을 떠올려보고 음미해 볼 시간을 놓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요.
‘폭풍의 화가’로 알려진 변시지 화백은 제주도 서귀포 출신의 화가입니다.
어린 시절은 오사카에서 보냈으며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일본 미술계에서 높은 권위를 갖고 있던 광풍회전에서 최고상을 받는 등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일본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해요.
고국에서 작품활동을 하기 위해 서른 살 무렵 귀국하여 이십 년 가까이 서울에서도 활동하였지만, 쉰 살이 되던 해 제주로 귀향하여 삼십여 년 이상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제주화’라고 불리는 독특한 화풍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황톳빛 화폭에 유화로 그린 변시지 화백의 그림에는 거친 파도가 하얗게 이는 바다, 그리고 언덕 위에서 바람을 맞는 소나무와 초가집과 지팡이를 든 초라한 남자, 어린 조랑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외로운 거 같으면서도 쓸쓸하지 않고 홀로 바닷가에 서 있는 모습에서 따스한 만족감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집채처럼 이는 파도마저도 정겨워 보입니다.
고향인 제주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이 전해오는 느낌이에요.
변시지 화백은 어린 시절의 사고로 평생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해요.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뛰어난 재능을 일찌감치 인정받았음에도 육신의 고난과 고독은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걸 그림으로 보여주는 듯하네요. 그러면서도 삶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온함도 있으니 지레 겁먹지 말라며 위로해주는 느낌이에요.
1987년에 개관한 기당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미술관이기도 합니다.
재일교포로 부를 일궜던 제주도 출신의 사업가 기당 강구범 선생이 미술관을 지어서 서귀포시에 기증했다고 해요. 변시지 화백은 제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기당미술관 설립에도 기여했으며 초대 관장을 맡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최남단 도시 서귀포, 인구가 고작 18만 명 밖에 안 되는 작은 소도시에 이처럼 아름다운 미술관이 있으며 더욱이 우리나라 최초의시립 미술관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진회색 벽돌로 외벽을 마감한 원통 모양 건물 두 개를 이어놓은 형태도 흥미롭습니다.
로비로 통하는 입구에는 그리스 신전처럼 가늘고 긴 하얀 기둥으로 둘러싸인 받친 원형 공간이 있는데요,
눈으로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거기 서 있으면 마치 하늘로 통하는 듯한 신비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답니다.
기당미술관 실내는 연한 빛깔의 반들반들한 나무 바닥으로 되어 있어서 우아하고도 따듯한 느낌입니다.
무척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한 부잣집 저택 살롱에 놀러 온 거 같아요. 문화적인 감성이 넘치면서도 개방적인 분위기입니다.
실은 미술관 건물도 서귀포의 가정집 느낌이 살짝 나는데요, 햇볕이 워낙 밝고 눈부신 서귀포에는 처마를 길게 내어서 가늘고 긴 원형 기둥으로 받친 주택들이 종종 보이거든요.
제주에 갓 내려왔을 무렵에는 서귀포 거리를 걷다가 지중해와 흡사한 이 느낌의 정체는 대체 뭔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는데요, 기둥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그리스 신전을 연상했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요.
높다랗게 자란 야자수와 무성한 종려나무에 둘러싸인 미술관을 보다가 남유럽의 이국적인 도시를 연상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 직접 한 번 눈으로 확인해 보시길 바래요.
기당 미술관을 나와서 들러봐야 할 곳은 삼매봉 도서관 별관 식당인 삼매봉 153입니다.
하얀색 단층 건물의 느낌도 좋거니와 이곳의 돈가스와 감귤 탕수육은 저렴하면서도 맛있기로 유명하거든요.
만약에 반드시 들러야 할 맛집 리스트가 꽉 차 있다면 이곳에서는 아메리카노 한 잔이나 시원한 물만 마셔도 괜찮을거 같아요.
차를 가져왔다면 서귀포예술의 전당에 주차하고 백 미터 걸어서 기당미술관으로 오기를 추천합니다.
한적한 산책로를 이용하면 거리가 가까울 뿐 아니라 서귀포 예술의 전당 건물을 위쪽에서 바라볼 수 있거든요. 부드럽게 패인 원형 지붕 모양이 오름 분화구를 모티브로 설계했다고 해요.
만약에 여행 일정이 서귀포예술의 전당의 공연 일정과 맞는다면 공연을 꼭 한번 관람해 보시길 바랍니다. 운이 좋다면 세계적인 유명 연주자들의 순회공연을 볼 수도 있거든요. 도립 서귀포 관악단도 멋진 클래식 레퍼토리에 연주 실력이 대단하고요.
독서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저녁 무렵 삼매봉 도서관에서 책 읽기 삼매경 빠져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전망 좋은 창가에 앉으면 한라산과 서귀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게다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쌓아놓고 홀가분하게 읽는 시간은, 혼자 떠나온 제주 여행에서만 누릴 수 있는 눈부신 사치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