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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파인 Oct 15. 2023

하우스홀릭 24  어디서 살 거야?!

집에 살다

    

 요즈음 많이 듣는 질문이다일터를 따라 이곳에 와서 30년을 살고 은퇴하고 나니 지인들은 자꾸 내게 묻는다대부분의 친구나 지인들이 서울과 수도권에 살고 있으니내가 긴 시간 지방에 살고 있는 게 신기한 일처럼 생각되나 보다. 나이 들어가니 병원도 가깝고친구들도 많은 그리고 성장한 아이들이 나가 살고 있는 서울에 와야 되지 않겠냐는 물음이다사실 함께 이곳에서 오래 살던 동료와 그 가족들도 은퇴 즈음해 하나둘씩 서울 인근으로 떠나기도 한다그러면 살짝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집이 있는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려고 한다2의 인생과 같은 거창한 계획 아니어도 그저 편안하게 익숙해진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소소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사실 아직은 바쁜 일상에서 떠난 것이 채 1년도 안된 상태라 지금의 여유로움이 너무 좋다.  해오던 공부와 글도 쓰고직장 다닐 때에는 불가능했던 봄가을 좋은 계절 주말이 아닌 주중 여행을 한적하게 다녀올 수도 있고마당과 텃밭에서 꽃과 채소를 돌보는 이런 시간들이 정겹기만 하다.  60대 중반을 넘어선 지인들을 보면 예전과는 다르게 모두들 아직 참 젊다그러니 무얼 할까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는 것 같다     

  

  흥미로운 사례도 있었는데 대기업 사장으로 은퇴한 한 지인은 서울집을 전세로 내놓고 그 자금으로 여유 있게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1년 살기를 하고 있다남편의 친구인데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동창회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른 지역에서 1년 살고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으로 1년 전에 왔다는 것이다.  골프를 좋아하는 아내와 여행을 좋아하고 아직도 전문적인 컨설팅 일을 하는 남편 모두 교통이나 생활 편의성그리고 자연이 좋아서 1년 더 살아 보기로 했다고 한다재미있는 선택인 것 같다.       

 

  대학을 퇴직한 남편은 책을 만드는 출판사를 하겠다는 로망이 있었는데퇴직하면서 출판사의 방향을 그림책전문출판사를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주변에서는 다소 엉뚱하다는 반응이었지만 1인 출판사 창업계획을 세워 느리게 진행하고 있다사실 이 지역 소도시가 그림책도시를 지향하며 몇 가지 사업을 하고 있는데이왕이면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담아 평생 하던 어려운 공부를 내려놓고 그림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나는 과연 될까하면서 반신반의 지켜보고 있었는데대학 산학협력단에서 제공하는 창업 강의를 듣고포토샵 강좌를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듣더니출판 홍보 강의도 챙겨 듣고 있었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그림책 작가과정을 듣기도 했다한 주에 한 편씩 그림책 스토리를 쓰고 제출하는 숙제가 있는 과정이었는데평생 학생들 과제 평가만 하던 사람이 그림책 강사님에게 칭찬받고 싶어 글을 쓰고 고치고 하는 모습이 조금은 우습기도 하고  대견(?) 하기도 했다.  나는 옆에서 조언인지 잔소리인지 자문인지 하며 거들고 있는데그림책 출판을 하는 작업이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출판사 상표권 등록저작권 계약그림책 디자인인쇄 의뢰물류 창고 계약 하나하나 검토하고 확인해야 하고거기에다가 정기적으로 지출 예산 정리와 세금 계산까지 다 혼자서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첫 번째 그림책이 출간되었다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아는 분들을 모시고 작은 출판기념회를 하고 온라인 서점으로 이 책이 나가게 될 것이다.  책의 미래는 지켜볼 일이지만 이렇게 무엇의 싹을 틔우고 느리지만 생산을 하는 과정과 작업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나는 아직 여유를 즐기는 단계이지만 하루 일정은 점점 규칙적이 되고 있다아침에 일어나 잠시 밖에 나가 꽃과 채소를 둘러보고아침 챙겨 먹고이웃에 사는 언니와 차 한 잔 마시고컴퓨터 앞에 앉아 그날 해야 할 일을 이리저리 처리한다집에 있으니 점심은 건너뛰고 4-5시가 되면 다시 텃밭과 마당일을 한다땀 흘리는 더운 날씨면 일 조금 하고 샤워하고저녁을 조금 이르게 챙겨 먹으면 하루가 지나간다저녁 시간은  다시 책을 읽거나고양이 파니를 어루만지며 TV를 보거나 컴퓨터 앞에서 밀린 일을 하다 잠든다하루가 간다이제 조금 더 예쁜 정원을 만들고 싶은데 아직은 여전히 몸이 게으르다.  아마 한 해 두 해 지나가면 꽃을 더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이 집에서 이렇게 느리게 규칙적으로 시간과 함께 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  고마운 일이다.  가끔은 외로울 수도 있지만 디지털 기술이 모든 곳을 연결해 주고 있어 산중에서도 소식이나 정보에 크게 뒤처지지 않을 수 있고마음만 먹으면 내가 확장하고 싶은 네트워크를 쉽게 만들어 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다그래서 건강만 유지된다면 조금은 조용하게 느린 시간 속에서 삶의 발자국을 여기 이곳에서 천천히 옮겨가며 살아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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