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정리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 시간은 보통 저녁을 먹고 난 후 저녁 10시쯤이다. 밤늦게까지 야경을 보고 집에 늦게 도착하는 날에는 11시 또는 자정이 되어서야 글쓰기를 시작하고는 한다. 다음날 일정도 있으니 최대한 빨리 글을 쓰고 잠을 청하려 하지만, 이처럼 조급한 마음을 가진 채로 손을 자판 위에 올려놓는다 한들 단 한 문장조차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할지 아무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하루의 일정도 마무리했고, 식사도 해결했고, 편안한 의자와 내가 좋아하는 음악 그리고 노트북과 아이패드 등 글쓰기에 필요한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는데 정작 글은 써지지 않는다.
때로는 오히려 1시간 남짓한 비행시간 또는 2시간 정도의 기차 여행에서 글이 더욱 잘 써지는 것 같다. 자리에 앉자마자 집중해서 글을 쏟아내고 나면, 금세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 휙휙 바뀌는 바깥의 풍경들 속에서 오히려 나는 글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껏 글을 쓰기에 완벽한 상태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런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다. 그저 글을 쓰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 그리고 그에 비례하는 시간 투자가 글쓰기를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 전에 읽었던 많은 에세이에서 여행 작가들은 여행지에서 문득 문장이나 주제가 떠오르면 핸드폰 메모장 또는 녹음기로 기록하고, 글은 숙소에 돌아와서 혹은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믿겨지지 않았다. 작가라는 사람들은 글 쓰는 재주가 충분한 사람들이고, 일필휘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일 양질의 글을 써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은 안심하기도 했었다. 하물며 작가도 그런데, 나는 당연히 그것보다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여행과 글쓰기를 함께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여행 작가는 날로 먹는 직업인 줄 알았고, 여행을 자주 떠날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러운 마음에 그들을 폄하하기도 했었다. 책 한 페이지를 5~6문장으로 채우는 여행 작가들을 미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그들의 마음을 알겠다. 여행에서 얻은 감상은 무척이나 휘발성이라서 금세 사라질 것이다. 그들이 다시 그 감정을 느낄 수 없음을 알기에, 그 감정은 그때 이후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들은 그 정도밖에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가끔 여행 중에 나도 모르는 감정이 마음속에 가득 차오르는 경험한 순간이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해서 지나쳐버리는 순간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나의 언어능력으로는, 나의 표현능력으로는 도무지 정의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일몰을 마주했을 때, 어떤 그림을 만났을 때, 어떤 놀라운 상황이 나를 찾아올 때 나는 그 상황을 그저 인상적이었다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었다. 그럴 때면 한없이 나 자신이 미워졌다. 누군가를 함부로 까 내렸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무언가 되어보기 전까지는 그것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누군가의 상황을 똑같이 경험할 수 없고, 누군가의 아픔에 완전히 똑같이 서 있을 수 없기에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한 인간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 밖에 있는 누군가의 힘듦을 동시에 겪어볼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그 사람이 될 수 없고, 그 사람이 겪은 상황을 똑같이 겪을 수 없기에. 그래서 다른 사람의 노력과 그 노력에 따른 결과물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누군가의 결과물에는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이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에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노력을 폄하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결과물이 아니라면 말이다.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것과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에는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 희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들의 노력과 시간과 희생이 조금씩 묻어난 결과물에는 그것 이상의 감동과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아름다움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지. 아름다움을 해치는 사람이 되진 않아야겠다. 아름다움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지,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사람이 되진 않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