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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선생님 Dec 20. 2022

아이는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킬까. 아이가 약속을 지키길 빈다.

  쌓였던 눈이 녹다 얼다를 반복한다. 날이 차다.

  아이가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어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수업을 중단시키고 들어 줄 만한 여유도 없었고, 나 자신도 감정적으로 지쳐있는 상태였기에 못 본 체 넘어가게 되었다. 아이는 계속 내 속을 긁어댔다. 다른 아이들에게 거칠게 말을 하고, 이따금 욕을 하기도 했다. 욕을 들은 이상 지도를 해야 속이 시원하겠기에, 나는 욕을 들을 때마다 불러 주의를 주었다. 아이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저 눈을 굴릴 뿐이다. 다시 다그치니 그때야 못 이기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돌아간다. 무슨 일일까. 물어봐야 하나. 아이는 알아달라고 온 몸으로 사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방법을 모르는 아이는 자신의 고통을 핑계 삼아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수업을 어찌어찌 끝마쳤다. 아이들의 분위기는 나름 좋았지만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이제 체육 수업이 거의 끝나가는 때문이다. 한 학기가 마무리되고 있었고, 전담교사의 자리는 누구나 원하기에 내가 다시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내가 다시 체육교사를 하려면 경력이 20년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은 앞으로 20년 동안은 체육시간에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볼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아이들의 즐거움을 보는 것이 즐겁다. 이제 볼 일이 많이 없는 아이들의 기쁨을 보고 싶었다.

  아이는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아이들을 약 올리고 놀려댔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투영하여 다른 아이들을 괴롭혔다. 괴롭게 했다는 표현이 옳다. 아이는 자신의 존재로 다른 아이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누구도 그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되지만, 아이의 사정을 아는 나에게는 그런 아이가 안쓰러웠다. 다른 아이들을 먼저 달랬다. 달래는 방법은 꽤나 간단하다. 잘못한 아이가 대가를 치르는 것을 보게 하는 것. 그것이면 된다. 아이를 불러 호통을 쳤다.

  내 앞에서 짜증을 내?

  네, 아니요. 얘가 먼저...

  아이는 헷갈린다. 감정이 앞서 이성이 마비되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왜 그랬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왜 혼나는지도 모른다. 그럴 수밖에.

  남아.

  제가 왜요!

  아이는 화가 나 소리를 지른다. 나는 일부러 과장된 제스처로 아이들의 마음을 달랜다.

  너희 다 돌아가.

  아이들을 보지도 않고 말한다. 아이들은 쥐 죽은 듯 교실로 돌아간다. 나는 아이를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아이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나도 아이의 눈을 마주 봐주었다. 조금 뒤, 아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때다, 나는 알았다.

  저기 가서 얘기하자.

  아이를 꺾었다. 강하게 아이를 꺾었으니, 다시 부드럽게 아이를 달래줄 차례다. 아이를 데리고 체육관 옆 의자로 간다. 아이는 순순히 따라온다. 아이를 데리고 이야기할 차례다. 나는 아이를 미워하지 않는다. 아이의 적은 내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과 싸워야 한다. 자신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 적을 알려줄 차례다.

  

  내가 너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다짜고짜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먼 산을 바라본다. 자주 혼나 본 아이들은 혼날 때 버릇이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프다. 얼마나 많이 혼나 봤으면. 혼날 때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면 피곤하니 아이는 정신을 어디론가 빼버렸다. 아이는 껍데기만 남아있다.

  나 보고 말해.

  몰라요.

  아이는 나를 보며 말한다.

  왜 몰라. 짐작 가는 것도 없어?

  없어요.

  왜 모른다고 할까. 내가 너를 좋지 않게 생각할까 봐 무섭구나. 그래도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선생님이 무섭게 너를 혼내기에 겁을 먹었구나.

  그러면, 점수로 말해봐. 제일 안 좋게 생각할 것 같으면 0점, 제일 좋게 생각할 것 같으면 10점.

  5점?

  아이는 무섭다. 내 반응이 두렵다. 내가 자신을 미워할까 봐 두려워한다.

  왜? 이유가 있어?

  몰라요.

  나는 너를 좋게 생각해.

  아이가 조금 요동친다. 영혼이 돌아왔다. 먼 곳을 보던 눈동자에 조금이나마 빛이 감돈다. 아이는 정신을 다시 온전히 돌려놓았다. 이제야 대화가 될 것 같다.

  왜 그럴까?

  몰라요.

  네가 행동이 거친 것은 너도 알지? 말이나 행동이나.

  네.

  하지만 나는 네 마음이 보여. 물론 내가 네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네 마음이 보여. 네가 마음속으로는 착한 아이라고 생각해.

  아이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쑥스러운 걸까? 나는 말을 잇는다.

  그런데 네가 행동을 그렇게 하면 주변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도 다른 친구들이 너 그렇게 좋게 안 보는 거 알지? 이 동네는 중학교 하나밖에 없잖아. 중학교 하나로 그대로 다 올라갈 텐데, 그때도 그렇게 생각되고 싶니? 나쁜 사람으로?

  아니요.

  그럼 나랑 약속 하자 하자. 지금부터 욕을 줄여보자고.

  네.

  얼마나 줄일 수 있을 것 같아?

  한 5프로?

  5프로로 만들겠다고, 5프로 줄이겠다고?

  5프로 줄일 거예요.

  그건 너무 적지 않니?

  아이는 웃음을 짓는다.

  그럼 10프로?

  30프로 어때? 3분의 1을 줄이는 거.

  좋아요.

  네 입으로 말해봐.

  앞으로 욕을 줄일게요.

  좋아.

  그리고, 왜 자꾸 슬리퍼를 신고와. 나랑 운동화 신기로 약속했잖아. 혹시 운동화가 없어? 실내화는?

  아이는 나를 바라보며 뭐라 말을 하려 한다.

  내일부터 운동화 신고 오자.

  그럼 일주일에 3번 신고 올게요.

  발전이다. 0에서 3은 굉장한 발전이다. 한 번이 세 번이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없던 것이 생긴 것이니까. 나는 여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 그럼 무슨 요일? 월요일, 목요일에 체육 수업이 들었으니까 그때는 꼭 신고와. 월, 화, 목 어때?

  월, 수, 금 신고 올게요.

  월요일 목요일이 체육 수업인데 그때는 당연히 신어야지.

  그럼 월, 목, 금요일에 신고 올게요.

  그래 약속이다.

  아이와 손가락을 걸었다. 내가 손가락을 내밀자 두 말 없이 손을 건다. 유치하다고 뺄 법도 한데, 아이는 나와 손가락을 걸어 주었다.

  그리고, 나한테 다시는 짜증 내지 마. 섭섭하니까.

  네.

  아이를 찌르며 말한다. 아이는 웃으며 도망가려 한다.

  이거 정리하는 거 도와줘. 그래도 너 내가 수업시간인데 수업 조금 빼준 거다? 감사하다고 해야지. 다음 수업 뭔데?

  수행평가요.

  무슨 과목?

  수학이요.

  공부했어?

  아니요.

  잘함은 넘게 받아와야지, 할 수 있겠어?

  보통 받을 것 같아요.

  몇 문제 푸는데?

  5문 제요.

  몇 문제 맞혀야 잘함인데?

  3문제는 넘게 맞혀야 할 걸요?

  그럼 3문제 넘게 맞혀와. 약속해 빨리.

  싫어요.

  나는 아이를 붙들고 간지럽힌다. 아이에게 사랑을 준다. 아이는 도망가려 버둥대며 웃는다. 웃으며 대답한다.

  알았어요, 잘함 받아 올게요.

  나 어디 있는지 알지? 잘함 받아서 가져와.

  네!

  아이를 보냈다. 아이는 나갔다. 약효가 얼마나 갈까? 오늘은 아이를 지도했지만, 아이가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아졌을까? 아이가 과연 앞으로 나아질까? 중학교에 곧 들어갈 텐데, 중학교에 가서도 지금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이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이가 걱정된다. 아이가 잘했으면. 나와 한 약속을 잘 지켰으면. 내일 또 한 번 말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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