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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선생님 Apr 07. 2023

요즘의 일상

괴로움이 많다.


  날씨가 맑다.



  며칠 앓았다. 때로는 열이 나고, 기침이 나기도 했으며 기운이 없기도 했다. 열이 얼마나 짜증 나고 성가신지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열은 밀어낼 수도, 쫓아낼 수도 없었다. 온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고, 무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 혈관이 퍼져있는 곳, 내 몸 중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이 아팠다. 때로는 덥고, 때로는 추웠다. 이불을 두텁게 덮고 있는 와중에도 떨었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와중에도 땀을 흘렸다. 열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구나, 열을 재어보지는 않았다. 아마 38도 내외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대략 짐작할 뿐이다.


  사흘 정도가 지나니, 몸이 다시 원래 상태로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느낀다. 바람만 불어도 애는 듯하던 피부의 통증이 사라지고 있다. 기침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고, 가래도 적어지고 있다. 그래, 또 이겨냈다. 다행히, 이번에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열 때문에 죽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나는 참 운이 좋았다. 운 좋게 또 버텨냈다, 생각했다.


  모든 직업이 그렇듯, 나도 아플 때 쉬는 것이 마냥 자유롭지는 않다. 물론 조퇴를 할 수도 있고, 많이 아프면 지각을 하고 병원에 다녀와도 된다. 정 너무 아파서 출근이 힘들면 출근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다. 내가 가지 못하면, 내 일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해야 한다. 쉬고 있던 대체 인력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일로 허덕이는 사람들이 그 위에 내 일까지 얹은 채로 허덕여야 한다. 그것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쉴 수 있겠는가. 나는 이번에도 쉬지 못했다.


  집에 와서는 아무 음식이나 닥치는 대로 입에 욱여넣었다. 낳으려면 뭐든 필요할 거라 생각하고, 뭐든 닥치는 대로 씹어 삼키며 영양소로 만들었다. 대단한 영양이 있는 식품들은 아니었지만, 열량이라도 제공되니 몸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나았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씹어 넘겼다. 다행히 몸은 나아졌다.


  감기나 독감, 뭐였을까. 같이 앓고 있던 여자친구는 학교에 독감이 돌았다 한다. 아이들에게 유행처럼 번지는 독감이 자신에게도 영향을 준 것 같다고 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감기에 시달리고 있다. 감기였을까, 독감이었을까.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독히도 아팠다. 나의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나았지만, 여자친구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열이 치솟고, 기침이 너무 심해 밥도 먹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병원에 급하게 달려가 수액을 맞으니, 열은 그나마 내렸으나 기침은 아직 이어지고 있다. 이 지독한 병은 도대체 뭘까.


  이렇게 쇠약한 상태에서도 아이들은 상황을 봐주지 않는다. 어제는 아이가 실험 도중에 눈에 묽은 과산화수소수 용액이 튀는 사고를 당했다. 학교에서 실험용으로 사용하는 과산화수소수 용액은 굉장히 묽은 것이고, 적게 한 방울정도 튀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과학 선생님과 보건 선생님께서 초동 조치를 너무 잘해주셔서 별 탈은 없을 것 같았으나 그래도 아이가 병원에 다녀오기까지 걱정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잠깐 출장차 밖에 나와있다가 소식을 듣고 얼른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아이는 진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간 후였다. 그래도 안심할 수 있었다. 정도가 심했으면 병원에서도 오래 걸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학교에 와서 아이의 눈을 보니 핏줄이 약간 서있었다. 약간 충혈된 채로 아이는 괜찮다고 했다. 그래, 미안하다. 내가 더 조심하도록 했어야 하는데. 아이는 장난을 치다가 다친 것이 아니었다. 수업을 너무 열심히 잘 듣고, 실험 순서를 잘 숙지해서 대표실험을 하기 위해 선정되어 앞으로 나간 것이었다. 실험 도구 중에 주사기에 용액을 넣기 위해 빼던 도중, 작은 방울 하나가 눈으로 튀어 들어간 것이었다. 아이는 늘 얌전했다. 다친 상태에서도 얌전히 기다렸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요즘 여자친구가 많이 힘들다. 모든 선생님들이라면 겪는 민원의 고통에 시달리는 탓이다. 악성 민원인이라는 사람들은 이성이나 논리가 없다. 해결되었으면 하는 사안이라는 것도 없고, 소위 민원이라는 것들도 대충 뭉뚱그린 내용일 뿐이다. 진정 원하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구체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전달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아이가 몸이 아프니 오늘 학교를 보내지 못할 것 같은데, 출결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서류는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와 같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물어본다. 그러나 이 악성 민원인이라는 존재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라고는 이런 것들이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화를 내지 마세요.'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해 주세요.'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는 이런 요구들은 사실 내용이 없다. 화를 내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냈으며, 화를 냈다고 짐작할 수 있는 말의 표현이나 어조, 크기, 혹은 행동은 무엇이 있었는지 모른다. 만약 내가 진짜 화를 내는 것이 불만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숙제를 해오지 않은 지난 금요일 4교시에,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XXX라는 표현을 쓰고 소리를 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표현이 아이들에게나, 혹은 사람에게 쓰기 적합한 표현인지 의문이 듭니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이 없다. 그저 자신의 심심한 인생에 취미 생활을 찾기 위해, 혹은 자신의 비루한 인생의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해 민원을 넣는 탓이다. 민원을 넣으면 어떻게든 학교에서는 수리하게 되어 있으므로, 자신이 뭐라도 된 듯한 존재감을 느끼고, 드디어 자신도 무엇인가 인생에서 이룬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수 있다.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없고, 투자하는 것은 없지만 대우받기를 원한다. 학교에서는 대우받는 방법이 너무 간단하다. 그저 민원을 많이 넣으면 된다. 공무원들은 민원인에게 민간 기업처럼 대할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민원을 본인이 뭐라도 된 듯 착각하며 권리인 듯 행사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옳건 그르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애먼 사람들이다. 민원이 반복되고 결국 민사 고소나 형사 고발까지 이어지더라도 실형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유죄 판결도 거의 없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아동학대라는 것은 진짜 학대당하는 아동을 구하기 위한 신고가 아니라, 자신이 대우받기 위해 하는 신고에 지나지 않으니까. 아무런 증거, 근거도 없다. 하지만 판결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준다. 무죄로 끝나면 뭐 하는가. 몇 년의 세월, 많은 시간, 돈, 정신적 피로감, 열심히 하고도 인정은커녕 신고를 당했다는 괴로움, 무력감.


  그렇게 신고하면 결국 교사와 아이들에게 모두 피해가 간다. 아이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기회를 빼앗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하지 못하면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본인이다.


  본인이 학교에 위와 같은 이유로 민원을 넣었다면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길 바란다. 본인은 지금 옳은 일을 하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투사가 아니다. 그저 본인의 비루한 인생의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쓰는 환자일 뿐이다. 마음이 아프다면, 멀쩡한 사람을 괴롭힐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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