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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선생님 Nov 14. 2022

구겨진 시험지, 아이의 미소

내가 교사로서 나아가고 있는 길이 아직은 틀리지 않았다.


  아침 내내 흐리다가 점심께부터 맑다. 아침, 저녁으로 강안개가 자욱하다.


  교사로서 느끼는 기쁨이란 다양한 종류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에게 그 중 제일은 무엇인지 꼽으라고 한다면 엇나가던 아이에게 희망을 느끼는 순간이다. 오늘은 그때 그 아이와 수업을 했다. 아이는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체육 시간에 아이는 꽤나 형편없었다. 판정과 팀 간 실력의 균형에 관해 불만을 가졌다. 나에게도 거침없이 짜증을 내고, 불만을 토로했다. 짜증을 낸다는 것이 그만큼 편해졌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 짜증을 듣는다는 것은 아이가 교사에게 당연히 가져야 할 거리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편한 선생님이 된다는 것은 아이들이 장난을 칠 수는 있지만, 짜증을 낼 수는 없는 거리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몇 번의 경험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눈치를 살핀다. 자신이 짜증을 낼 수 있는 대상인지 아닌지 순식간에 파악한다. 그리고 자신이 파악한 정보대로 행동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낼 수 있는 교사가 되지 않았다. 수업을 정돈했다. 싸늘한 목소리와 말투, 시선이면 충분하다. 아이들은 분위기를 재빨리 읽는다. 몇 초 후 체육관은 정적에 휩싸였다.


  이리와.

  아이는 투덜대며 천천히 걸어온다.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한다.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돌아보고 적절한 방법으로 처리하는 과정을 모른다. 그저 화가 나면 그대로 화를 분출한다.


  무슨 일이야.

  짐짓 모르는 척 묻는다. 교사는 교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대강 눈치로 안다. 하지만 아이의 입으로 듣고싶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어째서 그렇게 분노하는지.


  아니, 팀 밸런스가 안맞잖아요.

  아이는 짜증을 내며 말한다.


  다시 말해봐. 선생님한테 말할 말투가 아닌 것 같은데.

  싸늘하게 받는다.


  팀 밸런스가 안맞잖아요.

  '아니'가 빠졌다. 하지만 부족해. 이걸로는 예의를 가르칠 수 없고, 분노를 조절할 수 없다. 다시.


  다시 말해봐.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아이는 짜증 가득한 말투로 본심을 내뱉는다. 아이는 예의를 갖춰 화를 표현하고 싶다. 하지만 방법을 모른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주마.

  팀 밸런스가 안맞아요.


  팀 밸런스가 안맞아요.

  아이는 내 말을 그대로 따라 말한다.


  그래, 그렇게 이야기하면 돼. 그리고, 팀은 내가 너희에게 짜오라고 했지 않니? 팀을 짜오지 않은 것은 너희의 실수야. 내가 맞춰준다고 해서 맞지도 않고. 너희가 가진 능력이 숫자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완벽히 맞출 수 없다고 이미 말했잖아. 일단 시간이 가니까 이대로 재미있게 해보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넌 여기 앉아있어.

  나는 내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는 군말없이 내 뒤에 앉았다. 그리고 경기를 지켜봤다. 그 뒤로 흘러간 체육 시간은 문제없이 지나갔다. 아이도 어느새 혼났던 것을 잊었고, 아이들도 굳은 분위기였던 것을 잊었다. 

  그러나 나는 잊지 못했다. 나는 아이의 표정과 분위기를 살폈다. 아이는 괜찮아 보였지만 나는 혼낸것이 못내 미안했다. 그렇게 아이는 돌아갔다.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 다른 반 수업이 끝난 후였다. 아이가 문 앞에 서있었다. 나는 '친구를 기다리나보다' 짐작했다. 그러나 아이는 손에 종이를 하나 들고있었다. 저 종이는 뭘까. 궁금하던 찰나, 아이가 들어왔다. 아이는 종이를 흔들고 있었다. 나에게 종이를 얼른 보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종이는 과학 수행평가지였다. 아이는 자신이 다 맞은 수행평가지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담임선생님도, 아이의 부모도, 친구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는 나에게 자신의 수행평가지를 자랑하고 있다. 자신이 다 맞은 시험지를 먼 체육관까지 들고와 흔들고 있었다. 나는 시험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아이의 손에 내 손을 맞부딪쳤다. 그리고 아이를 안아주었다. 아이는 쑥쓰러운 듯 말한다. 이게 저예요.


  너 진짜 대단하다. 정말 잘했어.

  아이는 얼른 뒤돌아 나간다. 나는 가는 아이를 불러 한 번 더 이야기한다.

  야 너 정말 잘했어.

  아이는 미소를 띈 얼굴로 나간다. 나는 교사로서 느끼는 즐거움과 흥분에 매료되었다. 아이가 바뀌고 있다. 아이가 조금씩이지만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길 정말 잘했다. 역시 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아이의 미소, 그리고 손에 들려있던 조금 구겨진 시험지. 거기에 내 교사로서 나아갈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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