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니다 보면 정말 수많은 사람들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현지인들과도 그렇고 여행을 하는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신기하게 자주 마주치게 되는 사람이 있고 또 일회성에 그치기도 한다. 또한 어떤 경우는 일행이 되어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하다가 일정이 다르면 또 헤어져 혼자가 되기도 한다.
그런 사이
함께 다니다가도 생각하는 일정이 다르다면 언제든지 헤어질 수도 있는 그런 사이.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굉장히 계산적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어떠한 계산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우 단순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이 녹아져 있는 장기 여행자들끼리의 무언의 약속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일행들과 페루 마추픽추까지 일정을 함께 다니다가 일단 잠시 가고자 하는 곳이 달라 쿠스코에서 헤어지고 볼리비아 라파스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혼자가 되었다. 버스에 올라 장장 10시간 만에 목적지 페루 푸노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많이 늦어진 시간이기에 점점 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삐끼 아주머니의 사기성 가득한 말발에 속아 마음에 들지 않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머물러야 했고 그때서부터 제대로 맞춰지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푸노에서의 일정이 어긋나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우체국에 들러 우표를 살까 했지만 가는 날이 장날, 하필이면 공휴일이라 모든 관공서 및 상점 등이 문을 닫는 날이었던 것.
와. 어쩜 이렇게 다 꼬일 수 있지?
진짜 푸노에서의 일정은 허탕이구나.푸념하며 푸노의 가장 중심적인 관광지라 할 수 있는 티티카카 호수로 향했다. 그리고 계획에는 없었지만 즉흥적으로 우로스 섬 투어를 하는 배표를 구입하고 작은 배에 올랐고 작은 배는 어느새 파란 티티카카 호수의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 우연하고 즉흥적인 나의 선택이 꼬여가던 일정의 돌파구를 마련해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탄 작은 배 안에는 어느 근처 학교에서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온 듯 선생님 한 분과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었는데 그 나이 때는 어디나 그렇듯 시끄럽고 때로는 호기가 넘쳐 옆 사람들까지 피해를 줄 때가 있는데 뒤에서 자기들끼리 나를 쳐다보며 킬킬거리고 수군거리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던 상황이었다. 마치 중2병 아이들의 집단적 무례함이 느껴져서 같이 사진 찍자는 얘기에도 정중히 거절하며 조용히 혼자 우로스 섬에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 티티카카 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을 나누는 곳이기도 하고 해발 3,812m의 세계에서 사람이 사는 가장 높은 호수인데 여기서 "사람이 사는"이라는 수식어가 빠지게 되면 가깝게는 페루 와라스 69 호수가 4,600m에 있으니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는 아니게 되지만 이곳은 분명 "사람이 사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 인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목적지 우로스 섬은 그 티티카카 호수에 "사람이 살고 있는" 인공 갈대섬을 일컫는다. 출발한 지 오래지 않아 갈대가 배 양옆으로 끝도 없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우로스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갈대 섬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냥 일반 섬이라 할 정도로 거대한 섬이 호수 위에 있었는데 길게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는 갈대섬 위에 옹기종기 집들이 들어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각종 기념품들을 한쪽에 판매하고 있었고 그곳 주민이 우로스 섬의 제작 방식을 모형을 보여주며 관광객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주민의 설명에 의하면 우로스 섬에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갈대를 엮어 마치 거대한 배처럼 물 위에 둥둥 떠다닐 수 있게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고 했다. 갈대의 단면은 마치 예전 중학교 과학시간에 잘라보았던 부레옥잠의 단면처럼 구멍이 송송 뚫려있었는데 그 덕분에 물에 둥둥 뜰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조금 더 많은 설명들이 이루어졌지만 짧은 스페인어 탓에 흥미를 잃고 여기저기 둘러보던 찰나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주로 실내에서만 지내고 외출을 해도 선크림을 발라 하얗고 뽀얀 피부를 가진 우리나라 아이들과는 달리 이곳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티티카카 호수 위 나무도 없이 태양을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곳에서 직사광선을 그대로 받은 탓에 다른 페루 아이들보다도 훨씬 까맣게 탄 모습이었다.
무릎을 숙이고 아이들에게 다가가니 꼬마 아이들도신기했는지 생글거리며 다가와 주었다. 서로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카메라로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면 신기한 듯 쳐다보며 다시 찍어달라고 부탁하고 또 찍어서 보여주면 아이들을 까르르 웃으며 좋아해 주었다.
하지만 곧 다시 다른 갈대섬으로 이동해야 했고 그 아이들과 헤어져 좀 더 큰 섬에 도착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던 나에게 어린 꼬마 숙녀 두 명이 다가왔고 아까 다른 섬 아이들에게 했듯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니 역시나 까르르 천사처럼 예쁜 웃음을 지으며 너무 좋아해 주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포즈까지 취하며 다시 찍어달라고 하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 여지없이 까르르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이 마치 천사를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렇게 티 없이 맑은 영혼일 수 있는지... 그렇게 계속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푸노에 도착하면서부터 느꼈던 불쾌한 일들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호수 한가운데 전기가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르는 그곳에 컴퓨터며 와이파이며 이메일이며.. 있을 리가 없으니 사진을 전해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울 정도였다. 여행을 기획하며 폴라로이드 사진 출력기를 장바구니에 넣다 뺐다 고민하다 그냥 왔는데 너무나 후회가 몰려왔다. 비록 잘 찍는 사진작가는 아니지만 내가 찍은 아이들의 예쁜 모습을 추억으로 전해주고 싶었는데....
마리아라는 이름의 꼬마 아가씨는 나를 앉혀놓고 우리나라 ‘쎄쎄쎄’ 같은 손동작을 가르쳐주며 따라 해 보라고 했고 이내 아이들과 앉아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 문득 배낭 속 노란 종이비행기가 떠올랐다. 노란 종이비행기를 들고 다니면서 종이비행기와 함께 세계 이곳저곳을 찍고자 들고 다니는 것이었는데 그 종이비행기를 꺼내 아이들에게 날려주었다.
그저 노란색 종이로 접은 꾸깃꾸깃해진 작고 초라한 종이비행기였을 뿐인데 아이들은 너무나 좋아하며 종이비행기에 정신이 팔려 어느새 나는 잊힌 존재가 되었지만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기분까지 행복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배가 출발할 시간이 되어 배에 올라타자 그때까지 종이비행기로 놀던 아이들이 떠나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차오~!!!"(안녕~)
뭔가 큰 인연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고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찰나와 같이 짧은 시간을 보낸 어린 소녀들이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이들의 맑은 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그 아이들이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어서가 아닐까. 특히 관광객 "호객"행위에 열을 올린 우로스 섬 투어가 이 소녀들로 인해 나에게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소중한 추억을 남긴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스치듯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누군가처럼 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고 드라마 속 행인 1, 행인 2처럼 나에게 아무 의미 없는 엑스트라에 불과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매우 짧은 만남이지만 정말 오래도록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여행을 다니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 중에 매우 짧은 만남이지만 그 여운은 참 오래 남는 사람들. 바로 나에게는 이 소녀들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