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호수

그리워라, 그 날의 그것들.

by 콧수염장발
고향집 앞 호수

내 마음의 호수




고향집 앞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다. 나는 청소년 시절 매일 같이 호숫가를 찾았다. 호수는 들녘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고 오래된 저수지다.

집과 농장을 오가는 길섶에 자리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찾는 곳 이였다. 나는 이곳에 이르면 푸른 하늘을 담은 호수에 마음을 비취며 생각에 젖어들곤 하였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1817-1862)는‘월든' 호수를 좋아했다. 호수에 머물면서 자연과 진리를 탐구하면서 자연 속에서 인간이 한없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깨달으며“월든”이라는 글을 썼다. 자연주의를 지향했던 소로우는 세상의 탐욕과 욕망을 자연의 티끌 같은 것으로 치부하였다. 나는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월든'를 생각하면서 집 앞의 작은 호수를 찾았다. 그곳에서 잡다한 고뇌를 풀어놓으며 망상에 빠지기도 하였다. 나는 호수의 제방과 둘레 길을 걷는 것을 좋아했다. 푸른 잔디로 덮여있는 제방에 서면 닫혀있던 창문이 열리듯이 답답한 마음이 활짝 열렸다. 탁 트인 시야와 함께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마음속에 가득한 근심을 날려 보내곤 했다.

호수가 달빛에 젖어들고 별들이 속삭일 때면 내 마음은 물길 질을 하였다. 힘들고 외로울 때 호수에 앉아 상념에 잠기면 봄의 아지랑이처럼 상상의 꿈이 피어올랐다. 때로는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숫가를 걸으면 헤르만 헷세의 '안개 속에서'의 시를 읊조리며 깊은 몽상에 빠지기도 하였다.


유년시절 여름이면 친구들과 경사진 제방의 잔디에서 미끄럼을 타고 놀았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면 수문 위의 큰 소나무 그늘 아래 모여 더위를 식혔다. 호수 뒤 얕은 물가는 갈대숲을 이루고 있어 물고기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우리는 가끔씩 물장구를 치면서 갈대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다. 때로는 고기를 낚기 위하여 낚싯줄을 갈대 사이 빈자리로 살며시 던져보지만 고기보다 갈대에 걸려 낚싯줄까지 잃어버릴 때가 많았다.


들에서 일하다 어두워진 들길을 소와 같이 걸을 때가 있었다. 희미한 호숫가의 길을 별빛에 의지하며 걸을 때 덩치 큰 소는 호수에 빠질 것을 두려워했는지 묵직한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뿐사뿐 발을 옮기는데 호수에 비친 별들은 겁쟁이라고 놀리듯이 춤을 추듯 하였다.


그 호수는 사춘기 때 첫사랑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호수 위쪽으로 오리쯤 더 가면 시골마을이 있는데 그곳의 애들은 중학교 진학 때가 되면 지역의 경계를 넘어 먼 거리에 있는 읍내학교를 다녔다.


우리는 자주 만나 길동무가 되었고 정겨운 친구가 되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오늘까지 그곳의 동창들과 오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어느 날 하교 길에 우연히 그곳 지역의 여학생들과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다 한 여학생에게 참고서를 빌려주게 되었다. 며칠 후 돌려받은 책 속에는 하얀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여학생으로부터 받아본 첫 편지였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가슴에 품고 혼자서 읽고 또 읽었다.


여름이면 소녀는 신작로의 넓은 길을 나두고 가끔 호수가 있는 오솔길로 다녔다. 오솔길은 소녀의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였다. 호수가는 전망이 좋은 장소였다. 소녀는 그곳에 이르면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호수의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기도 하면서 한참을 있다가 떠나곤 하였다. 사춘기 시절의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은 있었으나 친구들에게 그런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내심 눈치를 보면서 편지를 써서 서로 책 속에 끼워 주고받았다. 이후 상급학교 시험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레 멀어졌지만 지금도 호수를 거니노라면 바람결에 실려 온 풋풋한 추억이 잠시 시간을 멈추고 호수에 잠긴다.


가을이 되면 야생오리가 날아와 호수가 얼 때까지 휘졌고 다녔다. 호수가 꽁꽁 얼면 신나는 썰매장이 되었다. 눈이 내린 날은 눈 덮인 얼음 위에 새로운 길을 내면서도 겁도 없이 호수 중앙을 가로질러 다녔다. 얼음 속 고기들이 궁금하여 도끼로 작은 구멍을 내어 낚시를 드리우지만 깊은 잠에 빠졌는지 입질도 하지 않았다. 때로는 저녁별이 반기는 시간에 널따란 빙판에 누워 두 팔 벌려 하늘을 항하여 온 우주를 다 품었던 때도 있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가끔 호수를 찾는다. 잔잔한 물 위에서 소금쟁이가 일으키는 미세한 파문이 심연의 끝까지 다가오면 무념 속으로 빠져들곤 하였다. 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생각 속에서 무한의 시간이 지나면 나의 정신은 하얀 솜털이 되어 푸른 하늘 속에서 날갯짓을 하였다. 그리고는 새로운 활력을 얻어 자연과 입 맞추며 나만의 세계를 찾아 떠나곤 하였다.


호수는 이글거리는 태양도, 온화한 달도 품었고 일렁이는 물결에 별들이 춤을 추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반겨 주었다. 호수는 나의 친구가 되어 고뇌할 때 위로가 되었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월이 지나 모처럼 호수를 찾았다. 옛 시절을 회상하면서 호숫가를 걷는다. 잔디밭 언덕에서 부르던 매기의 추억이 바람에 실려 온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아~ 아 희미한 옛 생각......”

노래를 부르며 놀던 어릴 적 친구들은 한 하늘 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아득하기만 하다.


뜨거운 여름 볕을 가려주었던 소나무는 온데간데없고 발길이 끓긴 제방은 무성한 풀에 덮여 황량하기만 하지만 갈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바람은 옛적 소녀의 전하고 싶은 속삭임이 되어 어디론가 달려간다.


잠들어 있던 기억들을 주섬주섬 건져 올려 보아도 낚이는 것이 없다.

아직도 푸른 하늘을 담은 호수는 내 마음에 드리워지고 옛 시인의 노래가 파문을 일으키며 내 마음의 호수 속으로 스러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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