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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숙 Oct 22. 2023

단호박

엄마는 구황작물을 좋아했다. 여름이면 뉴슈가를 살짝 푼 물에 껍질을 벗겨 삶은 감자가 소쿠리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겨울이면 찜기에 쪄낸 밤고구마가 식탁 한 귀퉁이를 차지했다. 감자철, 고구마철이면 뒷베란다에 감자와 고구마가 상자째로 구비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까? 중학교 1학년 때였을까? 집 앞에 고깃집이 새로 생겼다. 노란 간판에 검정 글씨로 쓰인네 글자 ‘참나무집’. 참나무집은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손님을 끌어모았다. 참나무집은 베란다에서 훤히 내려다보일 정도로 지척이었는데 저녁이면 차도, 사람도 바글바글했다. 참숯에 구워져 나오는 숯향을 머금은 돼지구이가 유명하다고 했다. 

 우리 가족도 바글바글한 무리에 합류해 보기로 했다. 아빠 퇴근 후 온 가족이 참나무집으로 내려갔다. 붉은 생고기 대신 뜨거운 연기와 함께 숯향인지 불향인지 모를 냄새를 풍기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고기가 서빙됐다.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한번 놀라고, 입안 가득 퍼지는 향에 두 번, 식감과 육즙에 세 번 놀랐다. ‘사람 많은 데엔 다 이유가 있구나. 괜히 숯불구이 숯불구이 하는 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명이나물에 고기를 싸 먹다 보니 고기가 순식간에 줄었고, 우리 가족은 두 판 정도는 더 고기를 추가해서 먹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참나무집의 진짜 별미는 단호박밥이었다. 만약 단호박밥이라는 게 어떤 음식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고기를 그렇게나 많이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호박밥은 단호박씨를 긁어내고, 밤, 은행, 불린 찹쌀을 넣고 푹 쪄낸 음식이었다. 호박이라 하면 동그란 애호박 전과 늙은 호박으로 푹 끓여낸 호박죽만 알았지 이렇게 노랗고, 부드럽고, 은은한 단맛이 매력적인 단호박이라는 게 있는 줄은 알지도 못했다. 고기는 몇 점 집어먹지 않던 엄마는 단호박밥이 나오자 마치 고기를 먹을 때와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쉬지 않고 끝까지 단호박밥을 드셨다. 구황작물을 좋아하는 엄마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메뉴였으리라. 자기 취향은 아니라는 듯 몇 숟갈 뜨지 않는 식구들 덕에, 더구나 마지막까지 숟가락을 놓지 않는 사람이 엄마이기에 나는 급할 것 없이 눈치 보지 않고 느긋하게, 배부르게 단호박밥을 먹을 수 있었다. 스프레드처럼 찹쌀 위에 부드럽게 으스러지는 단호박을 뭔가에 홀린 것처럼 싹싹 긁어먹고, 껍질까지 다 먹은 후에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단호박을 처음 먹은 날, 나는 엄마와 단호박으로 통했다. 


 하루는 시험공부하는 중이었다. 열한 시가 넘은 시각. 아빠와 동생들은 자는 중이었고 오빠는 기숙사 생활 중이라 집에 없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엄마와 나 둘뿐. 시험 기간이면 엄마는 공부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셨다. 엄마는 책을 읽거나 뭔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거나 소리를 아주 작게 하고선 TV를 시청했고, 중간중간 과일이나 간식을 챙겨 주셨다. 보통은 집중력 떨어진 내가 방 밖으로 나가면 간식을 챙겨 주셨다. 공부에 방해될까 봐 먼저 방에 들어오시지는 않았다. 아주 가끔 내가 자나 안 자나 확인하러 오시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날은 엄마가 먼저 방문을 빼꼼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딸, 배 안 고파?” 의아하게 엄마를 올려다보자 엄마가 말을 이었다. “우리 피자 먹을까?” 다들 잠든 시각, 우리만 먹어도 되나 하는 생각에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엄마를 멀뚱히 쳐다봤다. 엄마는 흔들리는 내 눈빛을 읽으셨는지 아예 내 방으로 들어오셔서 손바닥만 한 피자 가게 전단지를 내밀었다. “단호박 피자 작은 거 시켜서 조용히 먹자!” 마저 공부를 하는 동안 엄마는 피자를 주문했고 티브이를 끈 채 온 청각 신경을 문에 집중하셨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배달원 소리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내 청각 신경은 온통 방문 밖 엄마를 향하고 있었다.

 피자가 도착하자 나는 몇 발짝 되지 않는 부엌까지 살금살금 걸어가 식탁 의자를 슬쩍 빼고 앉았다. 우리는 아주 중요한 비밀 작전을 펼치는 요원이 된 것처럼 절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처음 먹은 단호박 피자의 생김새가 어떠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황금색 단호박 무스가 가득했는지, 깍둑 썰어진 단호박이 알알이 박혀 있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우와 단호박 피자 진짜 맛있는 거였구나!” 라든지 “여기 피자집 어디야? 치즈가 진짜 두꺼워!” 같은 감탄사 하나 없이, ‘소리 없이 피자 먹기 대회’에 나간 사람처럼 쥐 죽은 듯 피자를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와중에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게 하나 있는데 바로 미디엄 사이즈 피자의 앙증맞음이다. ‘세상에 이렇게도 작은 피자가 있다니!’라고 생각하며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피자 한 조각을 집어 들고 먹은 기억은 아직까지 선명하다. ‘소리 없이 단호박 피자 먹기’라는 임무를 마치고 나는 다시 방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두 조각인지 세 조각인지 남은 피자는 다음날 동생들 간식이었다. 

 가끔 그 밤이 생각난다. 아주 늦은 시간, 그것도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각 몰래 피자를 배달시키는 위험을 감행한 엄마, 빼꼼히 방문을 열고선 “우리 피자 먹을까?”라고 말을 건넨 엄마와 피자를 먹은 그 밤이 말이다. 그리고 상상해 본다. 내 방문을 열기까지 엄마는 피자를 먹을지 말지, 은숙이를 꼬실지 말지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를 말이다. 가끔 자정이 가까워지면 양념치킨이 먹고 싶어서 배달 어플을 뒤적이면서 먹을지 말지를 수백 번 고민하고는 하는데, 그날 밤 엄마도 나와 비슷한 고뇌의 시간을 보냈으려나? 답을 알 길이 없지만 멋대로 상상해 볼 때 그 밤의 엄마가 귀여운 소녀처럼 느껴진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내 방문을 빼꼼 열고 만 수줍은 소녀.


 단호박에 얽힌 엄마와의 추억이 한 가지 더 있다. 중2 때였던가, 중3 때였던가? 엄마가 같이 서울에 다녀오겠냐고 물었다. 엄마 진료 때문이었다. 내가 열네 살 때 엄마는 위암 3기 진단을 받고 바로 수술을 했는데, 정기적으로 서울대 병원에서 건강 상태를 체크했다. 보통은 아빠랑 병원에 다녀오시는데 웬일로 나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하셨다. 나로서는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엄마의 건강이 어떤 상태인지, 병원 분위기랄지 진료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에게 엄마의 제안은 ‘엄마랑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자’하는 제안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들렸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에 비하면 엄마의 진료는 매우 짧게 끝났다. 그 짧은 시간 병원 로비에서 엄마를 기다리면서 깨달았다. 내가 뭔가 단단한 착각으로 엄마를 따라나섰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우리 엄마가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환자라는 것을 말이다. 위암 진단을 받은 엄마는 환자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처럼 더 부지런하고 씩씩하게 생활했었다. 그래서 엄마가 아프다는 것을 잘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경직과 긴장감이 감도는 병원 로비에서 비로소 나는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료를 마친 엄마는 내가 경직됐다는 걸 알아챘는지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엄마가 말한 맛있는 것은 고속버스 터미널과 연결되어 있는 백화점 푸드 코트에서 파는 단호박 맛탕이었다. 우리는 해바라기씨, 호박씨, 아몬드 등 견과류가 듬뿍 뿌려진 반짝이는 단호박 맛탕과 집에서는 쉽게 먹을 수 없는 생과일 꼬치를 샀다. 멜론이었는지 파인애플이었는지 기억이 흐릿해진 과일 꼬치를 오물거리며 고속버스에 올랐다. 단호박 맛탕은 엄마가 진료를 받으러 올 때마다 먹는 음식이라고 했다. 단호박 맛탕 앞에서 엄마는 단호박 피자를 기다리는 소녀 그대로였다. 우리는 버스가 출발하기 전 달콤하고 찐득한 맛탕을 우물거리며 먹었고, 휴게소에 버스가 정차했을 때 다시 우물거리면서 먹었다. 

 단호박과 물엿의 강렬한 단맛에 병원에서 느낀 긴장감은 증발된 지 오래고, 그날의 기억은 단호박 맛탕으로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될수록 단호박 맛탕보다 내게 서울에 가자고 했던 엄마를 더 생각하게 된다. 엄마는 왜 나에게 서울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을까. 아빠 사정 때문에 혼자 병원에 가야 하는 엄마는 누군가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기숙사 생활을 하던 오빠를 불러 내기는 쉽지 않았을 테고, 아직 어린이인 동생들을 데려가는 건 손이 더 많이 가는 일일 테니 나를 제격이라고 생각했던 게 아니었을까. 마침 단호박으로도 통하는 사이이기도 하고 말이다. 


 단호박 샌드위치를 먹는데 단호박에 얽힌 엄마와의 추억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래서 남매 카톡방에 질문을 던졌다. “나 궁금한 거 있음! 엄마나 아빠가 나한테만 해준 애정표현이라고 느껴지는 것들 있음?? 나만 특별히 사줬다거나 만들어줬다 하는 거!” 오빠는 주말마다 기숙사에서 집으로 복귀하면 아빠가 “아들~~”하면서 목욕탕에 데려간 걸 자랑했고, 아연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면 매주 수요일마다 엄마랑 객사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데이트했던 걸 자랑했다. 난 단호박 피자와 단호박 맛탕을 자랑하려고 시동을 걸고 있었는데 “난 딱히 모르겠는데 생각나는 거 없음” 막내가 보낸 카톡이 울렸다. 순간 아차 싶었다. 막내가 여덟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막내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고, 막내가 어릴 적 아빠는 자식 넷을 뒷바라지하느라 여유가 없으셨다. 나는 얼른 앨범을 뒤져서 막내를 데리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던 사진을 무더기로 전송하고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다. “너 우리가 맨날 과자 사서 어린이집 종일반 끝나는 시간에 데리러 간 거 기억나 안 나? 너는 우리가 키웠지!” 

 단호박은 어쩌면 동생을 더 많이 사랑하라는 엄마의 사인인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주지 못한 맛있는 기억을, 맛있는 기억에 뒤따르는 사랑을 동생에게 가득 주라는 엄마의 사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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