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숙 Oct 22. 2023

오뎅

어묵이 올바른 표기법이지만, 어릴 적 우리 집 느낌을 내기 위해 어묵이 아닌 오뎅으로 표기한다.


“경은아 너도 오뎅 좋아해?”

“갑자기? 웬 오뎅?”

 다짜고짜 경은이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기억들은 맥락 없이, 사고의 흐름 없이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 밀고는 한다. 러닝 머신을 걷는 중이었다. 적당히 몸에 열이 오르는 중이었고, ‘이제 슬슬 속도를 올려볼까’ 타이밍을 재던 중 불쑥 생각이 났다. 오뎅국, 엄마가 끓여주던 오뎅국이 말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식탁에는 매일 등장하다시피 올라오는 식재료 몇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달걀. 달걀은 달걀 프라이, 달걀말이, 달걀탕, 달걀찜 같은 밥반찬은 물론이고, 삶은 달걀, 프렌치토스트나 길거리 토스트 같은 간식으로 식탁에 올랐다. 달걀이 들어간 요리 중 우리 사 남매에게 외면받는 요리는 하나도 없었다.

 두 번째, 감자. 달걀은 우리 사 남매가 선호하는 식재료라면 감자는 다분히 엄마가 선호하는 식재료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엄마는 유난히 감자를 좋아했다. 우리 집 된장찌개와 닭도리탕은 '감자찌개', '감자도리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큼직큼직하게 썰린 감자가 몇 움큼씩 듬뿍듬뿍 들어갔다. 양념을 머금은 채 겉이 살짝 으스러질 정도로 폭삭 익은 감자는 밥에 슥슥 비벼 먹기 제격인 별미 중 별미였다. 감자를 채 썰어 당근, 양파와 볶아낸 감자볶음은 냉장고에 상시 구비된 대표 반찬이었고(하지만 반찬통이 비워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푹 삶은 감자를 투박하게 으깨 마요네즈에 버무린 감자사라다가 식탁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감자 철이면 뉴슈가를 살짝 풀어 포근포근하게 쪄낸 달달 짭조름한 엄마 표 삶은 감자가 대나무 소쿠리에 쌓여 식탁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는 했다.

 세 번째, 멸치. 가끔 엄마와 시장에 가면 꼭 멸치 가게에 들렀다. 가게 사장님이 보여주시는 멸치를 꼼꼼히 살펴 신중하게 한 박스를 구입한 날이면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엄마와 마주 앉아 멸치 똥을 따는 게 일이었다. 그렇게 똥을 딴 멸치는 팔팔 끓여진 육수로 매 식탁에 올랐다. 간장과 고추장, 물엿을 살짝 넣어 볶아낸 멸치 짠지도 있었는데 감자볶음과 함께 우리 집 대표 냉장고 지킴이었다. 나는 멸치짠지를 좋아하지 않아서 몇 번 집어 먹은 기억이 없다. 어쩌면 멸치 짠지가 365일 냉장고 지킴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도 먹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도 한다.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말이다. 

 마지막 식재료, 오뎅. 감자볶음, 멸치짠지, 오뎅볶음은 우리 집 냉장고 지킴이 삼대장이었다. 삼대장 중 가장 인기 있던 것은 단연 오뎅볶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에는 오뎅 귀신이 두 명이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오뎅 귀신 오빠 김대원과 둘째 오뎅 귀신 여동생 김아연. 오빠는 떡볶이에서 떡은 조금도 입에 대지 않고 오뎅만 빠르게 골라 해치울 정도로 오뎅을 좋아했고, 아연이는 입이 심심할 때마다 과자 집어 먹듯 오뎅볶음을 옆에 끼고 손으로 집어 먹었다. 엄마가 한 번 오뎅을 볶을 때 어마어마한 대용량을 볶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날은 간장에만 졸인 달달한 오뎅볶음이, 어느 날은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살짝 더한 매콤 달콤한 오뎅볶음이 번갈아 식탁에 올랐다. 엄마의 오뎅볶음은 주로 납작한 사각 어묵을 어슷썰기 한 오뎅볶음이었는데 가끔 동글동글한 오뎅볶음이 식탁에 오르기도 했다. 엄마표 오뎅볶음은 식어도 딱딱하게 굳지 않았고, 물엿이 많이 들어가 찐득찐득하지도 않았다. 적당하게 간이 배인 오뎅은 항상 부드럽게 씹히는 정도를 유지했다.

 오뎅볶음 말고도 엄마의 대표 오뎅 요리 몇 가지가 더 있었는데 바로 오뎅 김밥과 오뎅국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오뎅 김밥은 다분히 오뎅 귀신 김대원과 김아연의 취향을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엄마가 말아주는 김밥을 좋아해서 엄마가 김밥 속재료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김밥을 돌돌 말아 김밥 산더미를 쌓고, 참기름을 슥슥 발라 칼로 썰어내는 모든 과정을 줄줄 꿰고 있던 나는 엄마의 김밥 변천사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두꺼운 달걀지단, 각각 기름에 살짝 볶아낸 길쭉한 햄과 당근, 살짝 데쳐 소금과 마늘에 버무린 시금치, 노란 단무지를 넣어 돌돌 말아낸 엄마표 김밥. 특별한 속재료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깨소금과 참기름에 버무린 밥 위에 재료를 가지런히 얹어 휘뚜루 말면 끊임없이 집어 먹게 되던 작고 통통한 엄마 표 김밥,에 언제부턴가 새끼손가락 한 마디 넓이 정도 되는 길쭉한 오뎅이 한두 줄씩 추가되었다.

 엄마 김밥에는 항상 짝꿍이 따라다녔다. 그것은 바로 오뎅국. 엄마 오뎅 요리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오뎅국이었다. 나는 오빠와 아연이처럼 각별하게 오뎅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오뎅국 만큼은 몇 그릇이고 “엄마 나 한 그릇 더 먹을래!”를 외쳤다.


 엄마의 오뎅국을 떠올릴 때면 하루 종일 푹 고와야 하는 사골이 생각난다. 그만큼 오뎅국에 기울이는 엄마의 시간과 정성이 대단한 탓도 있지만, 우리 집 오뎅국 전용 냄비가 깊은 사골 전용 냄비인 탓도 있었다. 내가 몇 그릇 리필할 정도면 오뎅 귀신 김대원과 김아연이 얼마나 허겁지겁 국그릇을 비웠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고, 그럼 오뎅국을 끓이는 데 곰솥이 필요했을 것이다.

 오뎅국 끓이기 일 단계는 육수 내기였다. 무, 다시마, 대파 뿌리, 멸치를 넣고 진한 색이 우러나올 때까지 팔팔 끓인다. 어느 정도 육수가 우러나면 멸치만 건져 냈는데, 냄비를 바짝 기울여 마지막 남은 국물 한 방울까지 싹싹 퍼 올릴 때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물흐물해진 무와 대파, 그리고 퉁퉁 불은 다시마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멸치를 건져낸 후 오뎅을 투하한다. 오뎅국에 들어가는 오뎅은 소위 포장마차 꼬치 오뎅인 길쭉이 오뎅이었다. 엄마는 이 길쭉이 오뎅이 퉁퉁 불다시피 할 때까지 오래도록 국을 팔팔 끓였다. 끓일수록 육수는 탁해졌고 오뎅은 퉁퉁 불었는데, 탁하고 진한 국물과 숟가락으로 부드럽게 잘리는 오뎅은 엄마표 오뎅국의 특징이었다. 엄마표 오뎅국의 한 가지 특징이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삶은 달걀. 삶은 달걀은 엄마표 오뎅국의 화룡점정이었다. 불을 끄기 전 매끈하고 뽀얀 삶은 달걀을 인원수만큼 국에 퐁당 빠트린 후 어슷썰기 한 대파를 넣고 뚜껑을 덮어주면 비로소 엄마의 오뎅국 완성이었다.

 엄마는 한 사람씩 넓은 대접에 오뎅국을 한가득 퍼줬다. 먼저 진한 국물로 속을 달랜 후 숟가락으로 똑똑 오뎅을 끊어 먹다가 삶은 달걀을 반으로 쪼개 노른자를 풀어서 먹으면… 대접은 순식간에 바닥을 보이고 “엄마 더 줘!”를 외치게 된다. 우리에게 오뎅국은 식사이기도 하고 간식이기도 했다. 넓은 대접으로 몇 그릇씩이나 먹는 오뎅국, 더구나 김밥이랑 같이 먹는 오뎅국이 어떻게 간식이 될 수 있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누구 하나 뒤처질 것 없이 놀랍도록 잘 먹는 우리 남매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에겐 식사와 간식의 경계가 흐릿했다. 오뎅국은 식사로도, 간식으로도 훌륭한 메뉴였다.


 12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성탄을 앞둔 교회는 각 부서마다 성탄절 행사 준비로 분주했는데 내가 속한 초등부는 연극 준비로 바빴다. 성탄 행사가 가까워짐에 따라 연습 강도가 강해졌는데 행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부터는 매일 저녁 모여 연습을 했다. 하루는 교회, 하루는 황 선생님 부부 댁, 하루는 김 선생님 부부 댁으로 옮겨 가면서 말이다.

 차로 이동했던 걸로 보아 그날은 황 선생님 부부 댁에서 연습이 있던 날이었던 것 같다. 차 뒷자리에 앉아 황 선생님 부부 댁으로 향하는 내내 나는 조마조마하면서도 뿌듯한 마음으로 발아래 분홍색 보자기만을 내려다봤다. 엄마의 오뎅국과 오뎅 김밥이 담긴 두 개의 보자기. 보자기에 가득 담긴 엄마표 요리에는 아이들을 지도하느라 애쓰시는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와 나를 비롯한 어린이들을 향한 응원, 그리고 무엇보다 딸이 기죽지 않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엄마의 의도였다면 백이십 프로 성공이다. 약 2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우리가 어떤 연극을 했는지, 어떤 역할을 맡았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내 발아래 실린 두 개의 책보 더미만은 선명하게 기억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오뎅을 즐겨 먹지 않는다. 집에서 요리해 먹을 정도로 오뎅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고, 포장마차 오뎅 꼬치, 백반집이나 반찬 가게의 오뎅볶음은 어릴 적 내가 먹던 것과는 사뭇 다른 맛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씩 아연이가 해주는 매콤한 오뎅 음에는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다. 아연이 오뎅볶음은 간도, 식감도 기가 막히게 엄마가 해주던 것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배운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더니 이것도 같은 맥락이려나.

 막내 경은이는 나를 닮아서 오뎅에 환장하는 아이는 아니라고 한다. 사실 처음부터 물어볼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경은이까지 오뎅에 환장하는 아이였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을 테니까. 좀 더 생각해 보니 아마 막내는 엄마의 오뎅국과 오뎅볶음은 물론 기억나는 엄마 요리가 몇 개 없을지도 모르겠다. 막내가 유치원 다닐 적 엄마는 맞벌이 일로 바빴고, 암을 선고받은 후로는 집보다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으니까 말이다. 곧 겨울이다. 오뎅국 먹기 딱 좋은 계절이 오고 있다. 이번 겨울에 전주에 내려가면 엄마 레시피로 오뎅국을 끓이고 오뎅 김밥을 몇 줄 싸봐야겠다. 그 맛이 나려나? 아, 아니다. 엉뚱한 모험심은 넣어두고 오랜만에 아연이에게 오뎅 볶음이나 한번 해달라고 조르는 게 현명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