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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Oct 27. 2024

지옥 시즌2

 다음날 우리 부부는 마트에 들렀다. 의자 밑에 붙여놓은 가구패드로는 부족할 것 같아 테니스공을 사서 끼웠다. 층간소음방지 슬리퍼를 가족 수대로 구입했다. 하지만 남편도 아이도 열이 많아서 슬리퍼를 신고 다니다가 벗기 일쑤였다. 할 수 없이 둘을 앉혀놓고 내가 고안한 뱀처럼 걷기 기술을 전수했다. 마치 거실에서 스키를 타듯 발을 살살 밀면서 걸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둘은 어이없어했지만 슬리퍼냐, 뱀이냐 양자택일을 요구하자 얌전히 뱀을 선택했다. 사이좋게 발바닥을 끌고 다니는 둘을 보면서 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예전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다시는 인터폰 소리에 놀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걸로 된 거다. 이걸로!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아이를 학교에 보낸 어느 오후, 우리는 느긋하게 일어나 점심을 먹으며 영화를 보고 있었다. 블라인드를 내려서 영화관 분위기를 연출하고 호로록 먹는 라면은 각별해서 순식간에 그릇은 바닥을 드러냈다. 배우의 익살스러운 연기에 키득거리며  있는데 거실 벽 귀퉁이에서 자고 있던 인터폰이 켜졌. 자기 밝아진 조명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000호에서 호출 신호가 왔습니다."


 아랫집이다. 온몸에서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같았다. 무슨 일일까. 뻔하다. 너무 뻔해서 숨이 턱 막혔다. 바닥에서 끈적한 기름이 흘러나와 거실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것 같았다. 남편이 영화를 멈추는 동안 무거워진 발을 끌어 인터폰 앞에 섰다. 마네킹처럼 굳은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 조용히 좀 하라고!!!!!!!"


 작스러운 아주머니의 고함소리와 함께 시 한번 악몽이 시작되었. 격과 떨림에 말을 잇지 못하자 그 사이에 달려온 남편이 인터폰을 향해 소리쳤다. 야? 지금 야라고 했어요? 점점 액셀을 밟으며 높이는 두 목소리가 마치 아우토반을 달리는 경주용 자동차 같았다. 긴장으로 어깨가 뻣뻣해진 남편의 얼굴은 점점 분노로 일그러졌다.   


 "말만 하지 말고 치세요! 내가 지금 당장 내려갈 테니까!"

 "와 봐라, 쳐줄 테니까!"


 작은 화면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흥분한 남편말릴 새도 없이 신발을 꿰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가보니 아랫집 문을 두들기고 있는 그의 등이 보였다. 남편을 말리는 사이 문이 리고 아주머니가 튀어나왔다. 뜨거운 기가 노여움 타고 복도를 가득 기 시작했다.


 "쳐 보세요! 한 대 쳐보시라고!"

 "내가 못 할 줄 아나, 어?"

 "그러니까 해보시라고. 말로만 나불대지 말고!"

 "그래, 이리 와 봐라, 와 봐!"


 개싸움도 이런 개싸움이 없었다. 남편의 팔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서 둘의 간격을 넓히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정신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 사이에 끼여서 남편의 가슴을 반대쪽으로 밀어냈다. 정해. 내가 해결할. 내려가서 기다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간신히 남편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옆집에서 중학생 정도 되는 아이들이 얼굴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경찰이 오게 됐을지도 모다.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주머니와 마주했다. 이유야 어쨌든 남편이 잘못된 행동을 했으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먼저 사과를 드리고 왜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 이유를 여쭈었다. 원인은 뻔했다. 도돌이표처럼 똑같은 말을 하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체기가 올라왔다. 우린 앉아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 소리는 우리가 낸 게 아니다 말씀드리면서도 내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통하지 않을 걸 알기에 무고를 주장할 의욕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를 믿어까. 의미 없는 맞장구를 치며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차가운 복도에서 다리는 저려오고 머릿속은 텅 빈 듯 멍해졌다. 그래도 나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짖어대는 강아지를 어르며 얘기하는 아주머니의 표정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반대로 그녀가 쏟아내는 감정에 나는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유순해진 아주머니는 그제야 미안하다는 말을 꺼냈다.


 "내가 요즘 작품을 쓰고 있는데 그게 잘 안 돼서 예민하게 굴었나 봐요."


 "지금 딸내미가 파리에 있는데 함께 간 친구랑 싸웠다잖아. 그게 계속 신경이 쓰이지 뭐예요? 그쪽도 자식 키우고 있으니까 잘 알 거예요."


 알긴 뭘 알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어이없는 얘기였지만 반박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예민하실 때는 집에 있지 마시고 근처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글을  보는  어떠냐고 넌지시 제안해 보았다.


 "아이고~ 내가 내 집 놔두고 어딜 나가. 다른 곳은 불편해서 못 가요. 집이 좋지."


 그 좋은 집, 나도 편하게 살고 싶다고 이번에는 응수했다. 서로 조심하고 또 서로 이해하며 살자고 저번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리는 헤어졌다. 힘이 빠진 나머지 집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 '이만큼 얘기를 들어드렸으니 한 동안은 조용하시겠지.' 하고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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