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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Oct 27. 2024

작업은 작업실에서

 우리 남편은 상냥한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예의가 몸에 배어있다. 대학생 때 잠시 목사의 꿈을 꿨지만 스스로 그릇이 안 된다고 느껴 포기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 한다. 붙임성이 좋고 궂은일은 나서서 하며 책임감도 강해 회피하지 않는다. 타고난 성품이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가끔은 그의 상냥함이 슬픈 처세술이 아닌가 싶어 속상할 때가 있다. 잦은 이사로 어디서든 적응해야 했던 탓일까. 모임에서 식사를 마치고 계산할 때의 어색한 순간을 싫어해, 남편은 언제나 먼저 카드를 꺼낸다. 주식으로 돈을 잃은 회사 선배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1년 후에 겨우 돌려받았다. 결혼식에 왔던 고등학생 때 친구들은 남편이 배에서 내릴 때마다 한턱씩 얻어먹기만 했지, 한 번도 밥을 산 적이 없다는 말에 기가 막혔다. 나는 뿌득 이를 갈면서 그건 친구가 아니라고 관계의 청산을 권유했다.  

 가세를 일으키기 바쁜 부모님과 빈번한 이사로 삶의 터전이 불안정했던 그는 애정결핍 증세가 있다. 결혼 후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거절과 부탁을 좋아하지 않고 가끔 호구 같은 행동을 해서 내 속을 태운다. 지나치게 남을 배려하다 보니 스스로 손해를 보는 일이 많아 속상하다. 그래도 욱하는 성미가 있어 화가 나면 무섭다. 상대방이 예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단칼에 관계를 끊는 칼 같은 면이 있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 길게 설명했지만, 결국 남편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친절한 사람이라는 얘기다. 그 사람이 예의만 지킨다면.  

 말로만 듣던 아랫집 아주머니를 실제로 대면한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역시나 호의를 몸에 장착하고 살가운 미소로 우리 집 투어를 시작했다.


 "마음껏 둘러보시고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거실, 안방, 작은방, 서재를 옮겨 다니며 집을 소개하는 그는 평소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숨길 게 없다는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아랫집 부부도 그런 그의 태도에 조금씩 긴장을 풀고, 어색한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놓여있는 가구와 의자를 만져보고 끌어보며 거기서 나는 소음을 테스트했다. 봇청소기에 관심을 보이고 남편에게 얼마나 자주 청소를 돌리냐고 묻더니,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사람은 집에 있는 물건만 보고 소음의 근원 찾을 수 있다는 건가. 결국은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을 탓하고 싶은 아닌지. 못마땅한 내 마음도 모르고 남편은 커피를 들어서 두 사람을 식탁으로 초대했다.


 "제가 글을 써요."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집중해서 글을 쓰고 있는데 계속 쿵, 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서요."

 "아.. 직업이 작가 신 거예요?"

 "네. 집중해서 잘 쓰고 있는데 쿵! 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찌나 놀라는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아요."


 ... 여기는 당신 집필실이 아니잖아요, 아줌마. 나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예민하면 작업실을 따로 마련해야죠. 왜 생활공간에서 이러고 있습니까. 하지만 나는 안 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 그군요."라고 대답했다. 속내는 달랐지만 싸우자는 게 아니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저희 발소리일까요?"

 "아니에요. 발소리나 애들 뛰어다니는 소리 같은 건 괜찮. 사람 사는데 그런 소리 날 수 있잖아요? 우리도 개 키우고 있으니까. 근데 이건 그게 아니라니까요. 갑자기 의자로 내려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요."

 "그런데 오늘 보셨다시피 소음이 날 만한 물건은 저희가 가진 게 없어요. 그렇다고 일부러 의자를 내려치거나 하지도 않고요. 저희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어요... 옆건물처럼 보이지만 여기가 3, 4라인과 이어져 있잖아요. 혹시 옆동에서 소리가 났을 가능성은 없나요?"

 "그건 모르겠어요. 아무튼, 오죽했으면 내가 공사장에서 하는 헤드셋을 하고 지낸다니까. 이게 머리를 꽉 조여서 얼마나 불편한데. "


 아주머니 예민함을 이해해 보려 노력해 봤지만  부작용처럼 해일 같은 짜증이 밀려왔다. 눈을 한 번 꼭 감았다 뜨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사실 소음 문제를 겪어본 적이 없어서요. 이게 얼마나 힘드신지 사실 잘 이해가 안 되기도 하고... 하지만 고통스러우시다는 건 알겠어요. 저희도 최대한 조심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


  소음의 출처는 찾지 못하고 아주머니의 말과 행동도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 조심하고 서로 이해하는 걸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내 속마음이야 어쨌든 거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저런, 힘드셨겠군요, 하고 상대방의 고통에 동조하면서도 우리는 집에 없는 시간이 많다, 모든 소음을 우리가 만드는 거라고 생각지 말아 달라 억울함을 호소했다. 문 앞까지 두 사람을 배웅하는데 퍼뜩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어제 해외에서 돌아왔는데! 그동안의 소음이 우리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할 좋은 찬스였다.  


 "오늘 말고 요 근래는 혹시 소음 어떠셨어요? 2, 3주 동안요."

 "계속 났지."

 "잘 생각해 보세요."

 "... 조금 덜 했던 것도 같고. 그래도 큰 소리는 났어요."


 그것 봐라!


 "저희가 3주 동안 일본을 다녀왔거든요. 3주 동안 낸 소리는 저희가 낸 게 아니에요. 뭐 하시면 여권 보여드릴게요. 도장에 날짜가 찍혀있으니까."


 몸을 돌려 여권을 가져오려는데 아주머니가 사람 좋은 눈을 하고 만류했다.


 "아유, 맞겠지~ 알겠어요. 내려가볼게요."


 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을 배웅하고 문이 닫자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더 이상 억울할 일은 없겠지라는 생각에 홀가분했다. "이제 괜찮겠지..?"라는 나의 중얼거림에 남편은 찻잔에 남은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이 보증수표라도 되는 양 온몸에 안도감이 번졌다. 그래. 괜찮겠지. 이제 괜찮을 거야. 마음을 바꾸자 오래된 먼지가 쓸려나간 방처럼 공기가 맑게 느껴졌다. 고요한 거실이 평화로웠다. 그럼에도 고개를 갸우뚱하던 아주머니의 표정은 잊히지 않아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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