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근무했을 때의 일이다. 남편이 배를 타고 군 복무 기간을 채우는 동안 나는 도쿄의 한 부동산 회사에 취직했다. 사무실은 아키하바라 고층빌딩 12층에 있었다. 메이드가 고양이 귀를 달고 티슈를 나눠주는 공상과 현실이 반반 섞인 기묘한 곳이었다.
사택은 전철을 타고 20분 거리로 건물 뒤편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봄이면 강물을 사이에 두고 벚꽃이 만개해서 꽃잎이 만든 연분홍색 물길이 장관이었다. 올해는 며칠부터 꽃이 필까. 지나가는 겨울을 배웅하며 개화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날은 찾아왔다.
창밖의 노곤한 햇살에 눈을 끔뻑이며 고객에게 메일을 보내고 있던 일상의 오후. 가벼운 진동과 함께 책상 끄트머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지진은 피할 수 없는 감기와 같아서 언제 걸릴지 알 수 없고 정도에 따라 후유증을 남긴다. 그날도 그저 스쳐가는 일이려니 생각하며 다시금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흔들림이 멈추지 않았다. 책장 가득 꼽힌 서류철이 서로의 몸을 밀어내며 덜컹거렸다. 하나, 둘씩 땅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이건 그냥 지진이 아니다. 황급히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흔들림은 점점 심해져서 몸을 숨긴 책상조차 좌우로 흔들렸다. 이게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격렬한 진동이 잦아들자 계단을 내려가 서둘러 대피했다. 번갈아 움직이는 두 다리가 엉킬 듯 후들거렸다. 가까운 공원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서로가 만들어낸 불안과 긴장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잔뜩 메우고 있었다. 전화는 먹통이고 지하철은 중단됐다. 길거리에는 부서진 유리조각과 콘크리트 덩어리가 나뒹굴었다.
아키하바라에서 사택이 있는 오쓰카까지 1시간 반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지나가는 길에 본 편의점들은 마치 전쟁을 겪은 듯 매대가 텅 비어 있었다. 귀가하는 사람들의 군집이 살아있는 해일 같아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그날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날이다.
수많은 여진과 방사능에 대한 공포로 많은 외국인이 고국으로 돌아갔다. 나도 진지하게 귀국을 고려했으나 결국은 맘을 접었다. 일에 대한 애착과 남자친구의 귀국 일정이 한참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했지만 일본 사회 전체가 불안으로 가득 찬 날들이 이어졌다. 재난용 비상용품을 준비하고 지진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인터넷에서는 다시 큰 지진이 일어날 거라는 추측성 정보가 너울거렸다. 방사능에 오염된 식재료가 유통된다는 소문에 생수를 사고 한국에서 배달받은 반찬만 집어먹었다. 불확실한 정보의 바다에 매몰된 마음은 매일 조금씩 깎여나갔다.
지금의 남편이 배를 내리고 결혼날짜가 정해지자 고민 끝에 일본 생활을 정리했다. 아마 그날이 없었다면 지금도 일본에 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초조함과 두려움이 없는 일상의 소중함. 지진 후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의 1년 동안 나는 몸과 마음으로 그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랬었다. 그랬었는데.
아랫집 아주머니는 24시간도 안 돼 다시 찾아왔다. 얇게 얼어붙은 한강물 같던 내 마음이 초인종 소리에 산산이 부서졌다. 분노가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정 없이 위로 솟구쳤다. 문을 열고 인사도 없이 그녀를 마주한 내 전신에서 화기가 넘실거렸다. 왜. 또 무슨 일이시죠. 이 미친 아줌마야.
소리가 또 나서...
아주머니는 어제와 다르게 무표정한 내 얼굴에서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럼에도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동그랗게 뜬 두 눈은 당당한 피해자를 자칭하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가. 소리가 나면 귀를 막든가, 밖으로 나가든가. 이사를 하든가, 정신과를 가든가!
... 혹시 건조기에서 나는 소린가요?
아니, 그런 기계소리 말고!
내가 딱 집중해서 글이 좀 써지려고 하면 어떻게 알고 쿵! 소리가 난다니까!
마치 지켜보고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아줌마..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린지는 아줌마가 더 잘 알지 않아요?
그럼 누가 아줌마집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지켜보고 있다는 말씀이세요?
우리 집이? 그게 가능해요?
이 아줌마는 미쳤다. 전형적인 피해망상이다. 더 이상 얘기를 나눌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두려웠다. 저 여자의 편집적인 시선이, 부풀린 과장이, 무표정과 표정을 넘나드는 얼굴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어투까지도. 내 인내심은 드디어 한계에 도달했다.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자연재해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분노와 함께 단전에서 퍼져나갔다.
가세요.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인터폰도 누르지 마세요.
하실 말씀이 있거든 경비실을 통해주세요.
아줌마 때문에 아주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서늘한 나의 말에 "집에 사람이 있어도 소리가 나네.."라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돌아갔다. 그대로 지옥으로 꺼져버려라. 터지기 직전의 화산은 시뻘건 용암을 내뿜기 시작했다. 갈 곳 없는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몰라 가슴을 움켜쥐었다. 바닥에 손을 짚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 거친 숨을 헐떡였다. 이대로 끝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늪 속으로 서서히 빠져드는 팔과 다리를 지켜보았다. 무력감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