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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그의 항해와 나의 기록 사이

by 유영해

문득, 남편의 얼굴이 희미하다.

그럴 리 없다며 피식 웃었다.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린 통증에도 기억은 어렴풋했다. 메신저 프로필을 열었다. 한참을 넘겨도 아이 얼굴만 나왔다. 돌잡이 때 만든 사진첩이 떠올라 펼쳐봤다. 페이지 끄트머리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여기 있네, 내 남편.’

그제야 부표처럼 추억이 떠올랐다. 첫눈에 호감을 느꼈던 눈매가 그리웠다. 짙은 선을 따라 검지로 쓸어보았다. 여전히 부드러웠다.


남편이 돌아온다. 바다로 떠난 지 8개월 만이다. 배웅할 때 불었던 칼바람은 떨어지는 낙엽이 되었다. 이번에는 나고야에서 하선한다. 추석 연휴가 겹쳐 항공권이 있을지 모르겠다.

“회사에 일등석 끊어달라고 해.”


남편은 ‘ㅋㅋ’ 웃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수험생이 된 기분이다. 귀국 날짜까지 하루가 빠르고 또 느리게 흐른다. 운항 스케줄은 태풍 속 해류 같다. 사흘 앞당겨지기도, 두 주나 늦춰지기도 한다. 한두 번 당했나. 기대하는 마음을 애써 누른다. 배는 내릴 때까지 내린 게 아니다.


그래도 이달 안에는 오겠지. 길게 타고 내리면 그만큼 오래 쉴 수 있다. 이번에는 어딜 가서 무얼 할까. 머릿속은 온통 놀 생각뿐이다. 기다림은 일상이다. 재회는 보상이다. 아이는 칭찬 스티커를 모으듯 학교에 다닌다. 나는 집안일과 육아 사이로 글을 쓴다. 우리는 아빠이자 남편의 귀국을 손꼽아 기다린다. 배를 타는 본인은 말할 것도 없다.


행복한 기대 너머 먹구름이 드리운다. 하선 후의 평화는 길어야 보름이다. 크고 작은 사건이 너울성 파도처럼 우리 집에 밀려든다. 슬픔도 기쁨도 두 배로 부푼다. 그래서 크게 울고 많이 웃는다. 그 소리에 모난 돌이 깎인다. 잔잔해진 해안가에 전화벨이 울린다. 승선 요청이라는 걸 너도나도 알고 있다. 된바람에 다시 한번 휘청인다. 느리게 돌아서는 등을 배웅한다. 여행 갔던 적막이 빈자리를 채운다. 나는 다시 딸칵딸칵 키보드를 두드린다.


상상만으로 휴가 한 번이 끝난다. 그도 그럴 게, 이 남자와 함께한 지 벌써 17년째다. 그동안 남자 친구는 남편이 되고 사이에 아들 하나가 생겼다. 산처럼 쌓인 일화에 어떤 일이 더해질까. 기대가 반, 걱정이 반이다.


요동치는 마음을 글로 다독인다. 혼자 풀기 적적해서 여러분을 초대한다. 끈적한 사랑에 야유를 보내고 부족한 됨됨이에 혀를 차도 좋다. 세상 한 귀퉁이에 이런 가족도 있구나, 가볍게 읽어준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뱃머리에 샴페인을 매달고 엔터키를 누른다. 폭죽처럼 일어난 거품은 항해의 첫발이다. 순풍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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