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다들 초콜릿 받으셨나요?”
“아뇨. 전 못 받았는데요.”
밸런타인데이였다. 어학원에 새로 온 알바생이 미니쉘을 돌렸다. 일본어 교사 중 나를 포함 두 명만 받지 못했다. 슬픈 척,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눈에 띄게 당황한 그가 “잠시만요!”를 외치고 사라졌다. 복사기 앞에서 자료를 정리하다 웃음이 났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 초콜릿을 돌리나.
“쌤!”
짧은 외침에 뒤를 돌았다. 초콜릿이 포물선을 그리며 내 손에 안착했다. 나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얏따!” (*해냈다!라는 의미의 일본어)”
멀뚱히 선 사내의 눈동자가 조금씩 벌어졌다. 얼빠진 모습에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오버했을까. 그래도 초콜릿은 달콤했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게 된 순간이었다.
선량한 알바생은 다음날부터 자주 알은체를 했다.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실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큼직한 손길 몇 번에 화이트보드가 새것처럼 반짝였다. 모두가 그를 '일 잘하는 알바생'으로 불렀다.
알고 보니, 사회 초년생인 나와 동갑이었다. 어학원의 청소를 도맡는 대신 토익 강의를 무료로 들었다. 한 과목 더 신청이 가능하다는 말에 내 교실을 찾았다. 강의실에 앉아 있는 그가 내심 반가웠다. 빠짐없는 출석에 꼼꼼한 숙제까지, 성실한 태도에 호감이 쌓였다.
“저랑 같이 점심 먹으러 안 갈래요?”
오늘쯤 고백하겠군.
나도 숙맥은 아니기에 의도가 빤했다. 기분 좋은 예감에 안테나가 찌릿했다. 싫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한 쌍꺼풀이 호선을 그렸다. 평소에도 예쁘다고 생각했던 눈매였다.
평일 낮임에도 길거리는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리를 걸었다. 인파를 피하느라 어깨가 부딪혔다.
“앗,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닿은 곳이 불에 댄 듯 화끈거렸다. 좋아하는 건 오히려 내 쪽이였나. 넘쳐났던 자신감이 모래알만 해졌다. 시선을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마른침이 큰소리로 목구멍을 지나갔다.
2층 파스타집은 조용했다. 투명한 통창 너머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부드러운 클래식 선율 사이로 주문을 마쳤다. 종업원이 사라지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기세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대학교 4학년이에요. 졸업하면 군복무 대신 3년 동안 배를 타야 해요. 7, 8개월 타고 내리면 2, 3개월은 쉴 수 있어요. 대신 월급은 많이 받아요. 진급도 빠르고요.”
“아, 그래요?”
“3등 기관사로 시작했다가 2등, 1등을 거쳐 기관장이 돼요. 그러면 연봉이 꽤 높아요. 차곡차곡 모아서 집을 사고 싶어요. 아, 결혼은 빨리하는 게 꿈이에요.”
사귀자는 말 대신 결혼 얘기가 나왔다. 열정에 밀려 고개만 끄덕였다. 눈을 빛내며 미래를 설계하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참 계획적인 사람이야. 어리둥절했지만, 경청하는 내 눈빛은 또렷했다.
“저는 안동이 고향이에요. 경기도에서 살다가 대학교는 부산으로 왔어요. 영도 안에 섬 하나가 통째로 학교인 곳이 있거든요. 지금 거기 기숙사에서 살고 있어요.”
“어쩐지 사투리를 안 쓰시더라고요.”
“선생님은 부산에서 쭉 사셨어요?”
“네. 교환학생으로 일본 갔을 때 빼고요. 그러고 보니 일본어 잘하시더라고요. 어디서 배우셨어요?”
“일본 애니랑 노래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귀에 익었나 봐요.”
취미가 같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공통된 관심사에 식탁은 금세 뜨거워졌다. 좋아하는 가수 얘기에 모닝구 무스메(1997년 결성된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 아이돌 그룹)가 나왔다. 아이돌에는 관심이 없어 속으로 뜨악했다. 서비스직 프로답게 티는 내지 않았다. 방심한 틈을 타고 돌직구가 날아왔다.
“키 작고 귀여운 여자를 좋아해요. 선생님처럼요.”
뭐라카노.
생글거리는 미소에 욕은 못 하고 떨떠름하게 웃었다. 경상도 남자와는 결이 다른 능글거림이었다. 토마토소스만 연거푸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나마 맛이 좋아 다행이었다.
이야기는 이어졌다. 말이 끊기는 법이 없었다. 대화에서 지식의 깊이가 느껴졌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걸까. 알면 알수록 궁금한 사람이었다.
“아는 게 참 많으시네요.”
조그만 칭찬에도 커다란 두 손이 허공을 저었다.
“그냥 이것저것 관심이 많을 뿐이에요.”
겸손은 미덕이었다. 설레는 감정을 들킬까 봐 꿀꺽 물을 삼켰다. 긴장한 공기가 진동했다. 신중히 고른 말이 상대의 입술을 떠났다. 사귀자는 말이었다. 두근대는 마음은 양방향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인파 사이를 걸었다. 스치는 손등이 간지러웠다. 마주한 손이 서로를 꼭 잡았다. 긴장한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다정한 눈빛이 뺨에 내려앉았다. 서로의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노을이 스며드는 시간이었다.
학원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슬그머니 손을 뺐다. 옆에 선 그림자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었다. 마주 본 시선이 장난스레 얽혔다. 멀리서 낮고 긴 고동이 울렸다. 로프가 풀리고 엔진은 뜨거웠다. 우리의 비밀 연애는 그렇게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