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금메달
“너무 외로워.”
그 말과 함께 눈물이 터졌다. 스물여섯의 봄. 나는 도쿄에 있었다.
한국에서 예약한 숙소는 도미토리였다. 새로 만든 게스트 하우스에 입주자는 나 혼자였다. 이층 침대 두 개가 좁은 방을 채웠다. 그나마 넓은 아래 칸을 차지한 게 운이 좋았다. 새로 도배된 집은 깨끗했지만, 온기라곤 없었다. 검은색 이민 가방 하나만 방 한쪽에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짐은 무겁지 않았어?”
남자친구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국제시장에서 산 가방은 높이가 허리까지 올라왔다. 정착 비용을 아끼려고 필요한 모든 걸 담아왔다. 공항 배웅은 가족이랑만 했다. 부모님을 소개하기에는 어색한 나이였다.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친구가 이사를 도와줬다. 거친 손잡이에 손바닥이 달았다. 말끔한 정장의 부동산 직원은 뒤만 힐끔거렸다. 값싼 바퀴는 울퉁불퉁한 길 위에서 몇 번이고 헛돌았다. 힘들다는 걸 들키는 게 왠지 부끄러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 어금니를 깨물었다. 친구한테는 퍽 미안했다. 다음을 기약하고 일찍 헤어졌다.
계약은 간단했다. 필요한 짐만 꺼내 침대 한편에 정리했다. 직원도 친구도 떠난 집은 고요했다. 설렘은 비행기 안에서 최고점을 찍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해가 지자 생소한 감정이 넘실댔다.
‘이게 외로움이구나.’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조용한 방을 울렸다. 인터넷 전화 너머 그가 숨을 죽였다. 학원에서 퇴사하면서 우리는 존댓말을 그만뒀다. 잠시의 침묵 끝에, 위로보다 원망에 가까운 말이 속을 파고들었다.
“그러게, 누가 가래?”
떠나는 자와 남겨지는 자. 슬픔의 경중을 비교하면 단연 남은 사람의 비탄이 컸다. 멀어지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해외 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아쉬움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러니 불쑥 튀어나온 낯선 감정은 당혹스러웠다. 눈물은 한국에 있던 연인의 몫일 터였다. 차가운 대답이 이해되면서도 서러웠다. 노트북 화면이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부어오른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남자친구 또한 첫 항해를 앞두고 있었다. 짐은 다 챙겼을까. 배웅해 줄 사람은 있을까. 전해 들은 가족사는 복잡했다. 부모님은 늘 바쁘고 남동생은 취업 준비생이었다. 혼자서 배에 오르는 뒷모습을 상상했다. 자못 쓸쓸했다. 내 감정은 어느새 조막만 해졌다.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분명 자신을 배웅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다음날, 외로움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생존 본능일지도 몰랐다. 나는 육지에서, 남자친구는 해상에서 각자의 전투를 시작했다. 3개월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구직 사이트에서 공고를 확인하고 이력서를 보냈다. 떨어진 면접만큼 정장에 주름이 잡혔다. 자전거로 전단을 돌려도 예금은 바닥을 보였다. 처음으로 신용카드를 긁은 저녁에 채용 문자를 받았다. 흥분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남자 친구에게 소식을 공유하는 건 쉽지 않았다. 바다에서 휴대전화는 먹통이었다. 배가 육지에 닿아도 사정은 비슷했다. 채팅도 인터넷 전화도 자주 끊겼다. 결국 비싼 요금을 감수하며 로밍 서비스를 이용했다. 소통은 언제나 일방통행이었다. 연락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계를 바라보며 나누는 대화는 촉박했다. 오랜만에 전화를 받으면 “보고 싶다.”라는 말을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늘 똑같았다.
“영해야, 다시 전화해 줘.”
처음에는 웃어넘기던 인사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서운했다.
‘해외에 나와 있기는 둘 다 마찬가진데, 왜 나만 전화비를 내야 하지? 나한테 돈을 쓰는 게 아까운 걸까?’
전화를 받을 때마다 쌓인 오해가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왜?”
“응?”
“왜 내가 다시 전화해야 해?”
“그거야... 내가 걸면 전화비가...”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나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거는 거잖아.”
“어... 그렇네. 알겠어.”
어색한 정적 뒤로 다시는 같은 부탁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서로 심 카드나 인터넷 크레딧, 전화카드를 사용했다. 긴 전화는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선상에서의 시간은 육지와는 다르게 흘렀다. 띄엄띄엄 전해진 근황을 짜맞출 수밖에 없었다.
힘든 하루를 버틴 날에는 한참을 망설이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멘트를 끝까지 듣고서야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어쩔 수 없지.’라는 체념의 소리는 위태위태했다. 정작 연락이 닿았을 때 불쑥 튀어나오는 짜증이 그 증거였다.
타지에서 적응하는 일은 고달팠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저평가받는 건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었다. 한 사람 몫을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그나마 높은 시급이 나를 견디게 했다.
힘든 건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견디는 파도는 닮아있었다. 목소리로만 전해 듣는 선상의 하루는 고단했다. 맛없는 밥, 뒤바뀐 낮밤, 끝없는 작업에 쉴 새 없이 일했다. 3등 기관사는 기관실의 막내였다. 꾸중은 일과였고 반성은 셀프였다.
속 터 넣고 얘기를 나눌 친구도, 연인도 없었다. 한정된 사람들과 주고받는 하루에 활력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일 못 한다는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어.”
그건 내가 타지에서 백배, 천배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우린 그 고집까지 닮아있었다.
이리저리 떠도는 사주를 역마살이라 부른다. 요즘은 해외여행에 좋은 팔자라고 한다. 중학교만 세 곳을 다닌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꽤 이사를 오래 다녔다. 우리의 이동에는 늘 그리움이 따라붙었다. 긍지와 책무를 양어깨에 걸치고 사랑을 이어갔다. 그 에너지로 한쪽은 일본에서, 한쪽은 바다에서 외화를 벌었다. 이 또한 국위선양이 아닌가. 원거리 사랑에 금메달을 걸어 달라. 우리의 노력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