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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Feb 20. 2023

어른의 기준

과거의 나에게 지금의 나는 어른 같아 보일랑가

나: 어김없이 시리즈를 또 시작했는데


너: 장르물?


나: 서스펜스 스릴러, 주인공은 엄마들.


너: 소재로서의 엄마는 참 다채롭구나.


나: 초등학생 자식들이 사건의 원인, 해결책에 자꾸 자기를 대입해. 엄마 소원이라 공부한다, 공부로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하니 거짓말이라도 하겠다.


너: 아이고..


나: 왜 그 시기에 다른 것보다 인과관계를 먼저 체득하는 걸까 궁금해졌어.


너: (아마도) 초기의 아이는 무언가를 받아들일 때 생존에 가장 긴밀하게 연결된 부모의 반응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반사적으로 습득하는 거 같아. 재미있는 거 재미없는 거, 먹히는 거 안 먹히는 거, 엄빠가 웃는 거 화내는 거,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거 흉보는 거 알아가는 거 같더라고. 그렇게 전후 상황에서 습득한 것들이 자기가 주인공인 인과관계로 전환되나 봐.


나: 고양이는 직접 사냥을 하는 순간부터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한대. 그래서 집냥이는 평생 자기를 아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대?


너: 인간이 잡은 기준이겠지만 흥미롭네. 넌 언제부터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여겼어?


나: 경제적 독립하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회사를 다닐 때 이제 나도 어른이라고 말하는 게 왠지 어색하더라? 같은 스테이지에서 돈 버는 아이템만 장착한 느낌. 학교에서 회사로 소속이 달라진 건 큰 변화였는데 어째서 스테이지가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냐.


너: 나는 회사를 다니기 시작할 즈음엔 확실히 달랐다가 새로운 소속에서는 허술한 초보단계를 겪으니 어른 같은 느낌을 못 받았고 회사에 익숙해질 때쯤에는 ‘이게 어른이라고?’라는 의심이 생겼어. 더 재미있는 걸 찾아보고 공부도 더 하고 회사도 바꿔보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는데도 도무지 환상 속 어른으로 짠하고 변하질 않더라고! 그런데 그 길목에서 내 환상 속 어른을 좀처럼 찾을 수 없다는 걸 알아가면서 그냥 지금의 내가 어른인 걸로 결정했어.


나: 찐 어렸을 땐 막연하게 화장하고 힐 신고 정장 입고 회사 가서 커피 마시고 레스토랑 가서 칼로 썰어 먹으면 어른인 줄 알았어. 어른놀이 하고 놀면 친구들이랑 ‘나중에 꼭 커리어우먼이 되자’고 편지도 주고받았어. 이제와 생각해 보면 직업 가지자 말고 다른 의미도 없는데 그땐 미래를 생각하면 설레고 벅찼다니까, 모.


어른에 대한 내 환상은 이런 거였네. 네 환상 속 어른은 뭐였어?


너: 확고하고 과감하고 독립적인 어떤 사람.


마라 국민으로서 어른이라면 하지 말라는 건 적당히 따라가는 거 같은데 어른이라고 특별히 뭘 할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야.


...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 환상 속 어른이랑 지금 내 모습이 꽤 비슷한 거 같아.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대견할 듯.


나: 와우, 좋다! 생각해 보니 이 시리즈를 보면서 이성적인 이유를 따르기보다 사람들을 지키는 결정을 하는 것도 나랑 너무 달라 보였어.


너: 그래, 아이가 생기면 삶의 태도가 진짜 달라지긴 해.


나: 드라마에서 모든 사건이 인과의 오해로 얽히는 걸 보면서 어른이 된다는 건 바로 그 지점이 아닌가 싶었어.


너: 음?


나: 애고 어른이고 자기를 원인으로 놓고 해결도 자기가 해보려다가 사달이 나잖아. 그게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둬서 생기는 게 아닌가.


너: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


나: 그거랑 다른데.. 그냥 세상을 잘 확장하지 못한 거 같아.


나를 거쳐가지 않는 모든 일들에 도무지 관심이 안 생기더라, 노력해도 안되더라, 친구 일인데도 그 맘이 오래 머물지 않더라, 그 얘기 기억나? 나는 내가 있는 곳에만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나 봐.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찐으로는.. 모르는 거지.


모두가 자기 세상이 있다, 그 세상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 노력을 하려던 건데 타인의 세상을 아예 보지도 않는 거야. ‘상대에게 일어나는 일이 나 때문인 건 아니다’, 까지 가려다 ‘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로 과하게 갔달까? 존중을 무관심으로 잘못 출력하고 있어.


너: 전에 네가 언니에게 어떤 조언을 제시하고 언니가 바뀌지 않았을 때 섭섭하다고 한 적이 있잖아. 언니한테는 반대 방향으로 과하다 너!


나: 응 맞아. 나는 그 상황들이 글로 옮길 만큼 섭섭해. 강요하는 게 이상하다는 걸 아니까 강요하지 않을 뿐이지.


여전히 나는 가까운 관계에서 내가 그 누구의 원인이지도 결과이지도 해결책이지도 않다는 걸 못 받아들이고 있어!


너: 야야 너 언니 그만 괴롭혀. 그래서, 오월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나: 인과관계를 극복하는 일. 가족과도, 가족 외에도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일. 서로가 서로의 원인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서로의 인생 자체로 상관있는 그런 관계 만드는 일.


너: 지금 인생과 뭐가 달라질까?


나: 그 속에서 진짜 독립체가 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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