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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해미고 24화

해미 수호자 나비

by 허관

나흘 동안 몸살감기로 고생했다. 열이 치솟을 때는 머리가 부풀어 오르는 듯했고 기억조차 아득해졌다. 엄마는 병원에 가야 한다고 아버지에게 사정했지만, 아버지는 시간이 약이라고 하면서 버텼다. 아버지가 말한 대로 시간이 흐르자 열이 내리고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널 산꼭대기에서 업고 내려오느라고 수덕사 시님들이 고생했댜. 특히, 그 뚱뚱이 시님 있잖아. 긍께 입이 메기처럼 생긴, 그 시님은 니가 뭔 일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되어 울구불구 했단댜.”


엄마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덩치는 곰 같은 포대화상이 어쩔 줄 몰라 우는 모습이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나온 교실은 적막했다. 일곱 명이 취업하여 자리가 듬성듬성 비었다. 종례를 마치고 나는 천천히 터미널을 향해 걸어갔다. 더는 도망 다니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러다가는 평생 도망 다니며 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철민이와 그를 따르는 후배들이 나의 뒤를 쫓아왔다. 모두 상대할 수 없었다. 쿤타의 말대로 한 놈만 집중적으로 공격해야 했다.


“야 병든닭!”


터미널 광장으로 들어서자, 2학년 후배가 나를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불렀다. 내가 상대해야 할 그 한 명은 저놈이 아니었다. 바로 철민이었다. 그날도 역시 철민이는 오락실 앞에 앉아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철민이를 향해 걸어갔다. 후배들이 내 앞을 막았다.


“이런 개새끼들!”


그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외침이 들렸다. 단추구멍이었다. 목발에 의지한 채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곤 목발로 내 앞을 가로막은 후배들을 후려쳤다. 비틀거리며 후려친 목발은 곧바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단추구멍도 함께 넘어졌다. 후배들은 넘어진 단추구멍에게 다가가 발로 머리와 가슴을 톡톡 건드렸다. 나는 목발을 거꾸로 움켜쥐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목발의 손잡이에 머리를 맞은 후배 두 명이 쓰러졌다. 나머지 세 명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터미널 넓은 마당에 가득했던 학생들이 흩어졌다. 그때 철민이를 선두로 몰린눈을 비롯해 다섯 명의 똘마니들이 학생들 틈을 비집고 나와서 나에게 다가왔다.


‘저놈만 죽이면 돼.’


나는 쿤타의 말을 되새기며 철민이만을 노려보았다. 철민이가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목발을 들어 손잡이 부분으로 철민이 목을 강하게 밀었다. 철민이가 뒷걸음치더니 벽에 부딪혔다. 철민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당황한 철민이 일당들이 나에게 대들었다. 바로 그 순간 거대한 돌풍이 휘몰아친 것처럼 똘마니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대호다. 대호가 눈을 질끈 감고 똘마니들을 향해 멧돼지처럼 돌진해 볼링핀처럼 쓰러트린 거였다.


목발에서 빠져나온 철민이가 목발을 부러트리더니 나를 향해 휘둘렀다. 목발이 내머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나는 넘어지면서 얼떨결에 철민이의 발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리곤 곧바로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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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깨어났다. 나는 여전히 철민이의 발목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등이 벌에 쏘인 것처럼 따가웠다. 기절한 사이에 철민이가 목발로 나의 등을 계속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철민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철민이는 나의 주먹을 피하더니 나의 복부를 때렸다. 숨이 막혔다. 나는 다시 철민이 몸에 매미처럼 매달렸다. 그때 대호가 눈을 감고 양팔을 휘두르며 철민이를 향해 뛰어왔다. 눈을 감고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대호의 주먹을 철민이는 여유롭게 피하자마자, 대호의 주먹이 내 머리를 때렸다. 나는 다시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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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초 후에 다시 깨어났다. 철민이는 여전히 나의 등을 때렸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나는 팔꿈치로 철민이의 턱을 가격했다. 철민의 몸이 통나무처럼 앞으로 쓰러졌다. 나는 철민이 곁에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철민이가 다시 일어났다. 철민이의 주먹이 나의 왼쪽 턱을 가격했다. 나는 쓰러지면서 철민이에게 와락 마지막 힘을 다해서 엉겨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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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깨어났다. 나는 비틀거리며 철민이에게 다가갔다. 철민이의 발이 나의 복부를 가격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정신이 몽롱했다. 마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숨을 쉴 수 없음은 물론, 거대한 바위가 몸을 누르는 것처럼 답답했다.


그때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단추구멍이 나에게 기어 왔다. 내 허리띠를 풀고, 옷을 벗겼다. 그제야 숨이 트였다. 누워서 바라본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나란히 흘러가고 있었다. 백목련처럼 아름다운 구름이었다. 그 순간, 철민이와 그의 똘마니들의 얼굴이 하늘을 가렸다.


“그만하지.”


그때 들린 묵직한 목소리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비였다.


“아무리 밑바닥을 굴러다녀도 기본은 지키자. 똥물에도 파도가 있어. 후배를 시켜 선배를 때리게 하는 건 너무 지저분하지 않니? 더러운 자식.”


“그래. 나 더러운 거 지금 알았어?”


“어쭈. 철민이 많이 컷 네. 나 나비야. 잊었어?”


마주 보던 두 그림자가 격렬하게 엉겨 붙었다. 나비의 주먹과 발이 철민의 몸 곳곳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나비가 철민이를 결딴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어났다. 땅바닥에 앉아있던 단추구멍에게 손을 내밀었다. 단추구멍은 내 손을 잡고 힘겹게 일어났다. 거인이 터미널 광장에 가득한 학생들 틈으로 사라졌다. 해미 천변에 보았던 나비의 등이다. 쓸쓸하고 거대한 등. 나비는 정말로 해미의 수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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