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 장례식을 마치고 5일 만에 등교했다. 점심시간에 대호가 찾아와 그간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비가 해미에서 사라졌다는 둥, 철민이가 이제 나비의 자리에 오를 거라는 둥, 그런데 나비가 다시 나타났다는 둥.
“아 그래서 나비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잘 모른다고.”
대호가 언제부터 나비 사정을 알고 있었을까. 이전에도 나비는 은둔의 인물이었다. 모르는 게 당연했다. 당연히 대호의 말은 빙빙 돌기만 했다.
“야 어디가? 내 말 안 끝났는데.”
“단추구멍 얼굴 보려고.”
“단추구멍 지금 없어.”
“왜?”
“병원에 입원했어.”
“어디가 아픈데?”
“작년에 해미읍성으로 쳐들어온 꼴뚜기 똘마니 있잖아. 그 자식이 감옥에서 나와서, 단추구멍을 손봤대.”
“어느 병원이야?”
대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곧바로 교무실로 뛰어갔다. 마침 베어가 있었다. 나는 베어에게 어느 병원인지 알아내고 곧바로 서산으로 향했다. 대호도 나를 따라왔다.
단추구멍의 모습은 참혹했다. 얼굴은 퉁퉁 부어 그나마 작던 눈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머리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고, 왼쪽 다리와 오른쪽 팔은 석고로 고정되어 있었다. 팔과 다리가 부러지고 갈비뼈 3개가 골절되었다.
“병든닭? 야 살아있었구나. 반갑다. 씨발, 어제까지는 조금 보였는데 오늘 아침부터는 눈이 떠지지 않네. 아예 안 보여.”
단추구멍이 웃다가 찡그렸다.
“알았어. 가만히 있어.”
나는 단추구멍의 손을 잡았다. 두툼한 손바닥이 거칠었다.
“정말 치사하게 말이야. 윽~윽~ 뒤에서 우르르 덤비잖아. 주먹 한번 날려보지 못하고 이 모양 이 꼴이 되었...흐흐...으으..”
단추구멍은 말하면서 웃다가 고통스러운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알았어. 다음에 얘기해.”
“그 자식들이 해미에 와서 해코지하면 어떡해?”
대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걱정마...흐흐..윽윽....그들 두목이 그놈에게 서산 땅 밟으면 물고기밥이 될 거라고 엄포를 놨다고 해. 아마 서산엔 얼씬도 못 할 거야..흐흐..으....그들에게 두목의 말은 곧 법이거든..,,흐흐...으으으으....진정한 건달...이..으..”
단추구멍에게 내일 또 온다고 말하고 일어났다. 단추구멍이 너무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최소 두 달은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외삼촌 장례식 때문에 학교를 비운 사이에 동업 아저씨와 배바지가 자퇴했다. 동업 아저씨는 아들이 태어나자 더욱 바빠졌다. 농사를 지으면서 더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배바지는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대전 공장에 취직했다. 그들이 사라지자, 철민이의 세상이 되었다. 동업 아저씨와 배바지가 있을 때도 철민이가 설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다만 동네 형 앞에서 못된 짓을 할 수 없어서 그들 앞에서는 그나마 눈치를 봤는데, 이제는 그마저 사라져 버렸다.
교실은 수시로 적란운이 덮었고 천둥 번개가 쳤다. 적란운이 철민이라면 천둥 번개는 그를 따라다니는 몰린눈 따위의 똘마니였다. 조금 달라진 점은 왕눈이가 내 눈치를 본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철민이의 행동은 교활했다. 자기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친구들에게 폭력을 지시했다. 철민이는 부모들끼리, 또는 형제들끼리 잘 알고 있는 동네 애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주로 그가 괴롭히는 대상은 다른 지역 출신 학생들이었다.
그러다가 끝내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고 말았다. 철민이는 깊이 숨어 있는 마지막 자존심을 끄집어내고, 기본 윤리를 짓밟고, 도덕을 무너뜨리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존재는 똑똑한 악마다.
하교 시간 해미터미널은 해미중과 해미고 학생들이 뒤섞여 북적거렸다. 터미널은 버스가 들어와 돌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그곳에서 철민이는 2학년 학생들을 시켜 마음에 들지 않는 3학년 학생을 집단 폭행하게 했다. 3학년 누구도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나서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다음 상대가 자신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런 일을 몇 번 봤지만 모른 척했다. 철민이는 항상 터미널 광장 왼쪽 모퉁이 오락실 출입문 근처에 있는 붉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지켜봤다.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조잘거리던 대호의 방문이 뜸해졌을 때, 베어마저 해미를 떠났다.
“나는 잠시 학교를 떠난다. 내가 학교로 다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자 한다. 나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윤리 선생님이다. 윤리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다. 나는 사람의 도리를 위해 떠난다.”
베어의 말은 난해했다. 하지만 그의 진지한 표정은 큰 싸움을 앞둔 장수 같았다. 베어가 떠나고 곧 나라에 큰일이 일어났다. 베어가 해미를 떠난 날이 바로 1987년 6월 5일이었던 것이다.
모두 떠난 학교였다. 철민이는 나를 숨 막히게 압박해 왔다. 나는 생각했다.
‘지옥 같은 해미에서 도망치기로, 이 정도면 오래 다녔다고, 무슨 일을 하든 굶어 죽기야 하겠는가.’
책가방에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해 봐야 즐겨 보던 책 몇 권과 마이마이가 전부였다. 그리고 벽장 깊숙이 숨겨 놨던 마늘 판 돈 4만 원을 가방에 넣었다. 서산 터미널에서 대전행 버스에 올랐다.
대전 버스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전봇대에 붙은 구인 광고를 보고 곧바로 택시를 탔다. 공장은 대전 외곽에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 꽤 큰 공장으로 주력 상품은 전화기였다. 나는 곧바로 업무를 시작했다. 내가 맡은 업무는 도금 과정에서 불량이 난 부품을 모아 도금을 벗기는 일이었다. 도금을 벗기는 약품은 독했다. 손에 한 방울이라도 묻으면 부글부글 끓어올라 두꺼운 장갑을 태우고 곧바로 살에 구멍이 뚫려 뼈가 보일 정도였다. 40여 년이 지났는데도 내 손등엔 아직도 그때 생긴 흉터가 있다.
아무튼,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무척 재밌었다. 엄밀히 말하면 재미라기보다는 행복했다고 해야 옳지만 말이다. 아침에 도금 벗기는 좁은 작업장에 들어가면 점심때 잠깐 나올 뿐 종일 그 안에 있었다. 작업장에 들어가면 저절로 노래가 나왔고,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이 리듬을 탔다. 나는 지금도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걸 질색했고, 한참 사춘기에 신경이 날카롭던 그때는 더 했다. 그랬던 내가 멋들어지게 가성과 진성을 넘나들며 그 리듬에 몸을 맡겼던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깨어 보니 병원이었다. 염산가스 중독으로 기절했던 것이었다. 알고 보니 기분이 좋았던 것은 염산가스 중독 때문이었다. 몸이 약하거나 염산가스에 쉽게 중독되는 체질이면 나 같은 증세를 보인다고 했다. 나는 염산가스가 그리웠지만,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프레스 부서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프레스 부서의 업무는 단순했다. 철판을 강력한 기계로 눌러 일정한 틀을 찍어내는 일이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철판을 넣고, 스위치를 올리면 압착기가 내려와 철판을 누르면서 전화기 부품을 찍어냈다. 프레스 한 대당 두 명씩 일했다. 사수와 보조였다. 사수는 장비 상태만 점검할 뿐 반복적인 작업은 보조가 했다. 물론 초보인 나는 보조였다. 보조는 대부분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 손가락이 한두 개 없었고, 일부는 손가락이 모두 잘려 엄지만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손가락이 잘렸을 때, 잘린 손가락을 들고 빨리 병원에 가면 붙여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와 같이 작두로 소여물을 썰다가 엄마의 가운뎃손가락이 여물과 함께 잘렸다. 엄마는 침착하게 손가락을 들어 먼지를 털더니, 이웃집 아저씨를 찾아갔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트럭을 몰던 아저씨였다. 트럭을 타고 큰 병원에 갔다가 다음날 손에 붕대를 감고 엄마가 돌아왔다. 급하게 붙이느라 조금 삐뚤어지긴 했지만, 그 이후로 엄마는 불편 없이 생활했다.
그런데 프레스를 다루는 아이들은 손가락이 없었다. 이상했다. 하지만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한 달 생산 물량은 정해져 있었다. 월말이면 생산 물량을 채우기 위해 밤늦게까지 작업했다. 자정이 넘으면 그 넓은 작업장은 거대한 심장처럼 쿵! 쿵! 규칙적인 소리만 울려 퍼지다가, 새벽 2시쯤 되면 그 소리마저 아득해졌다. 졸음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비몽사몽 상태로 반복된 작업을 할 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아득하게 멀어지던 정신이 후다닥 내 머릿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뛰어갔다. 철판을 눌러야 할 프레스가 손가락을 눌러 호떡처럼 넓게 펴 놓았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아무리 유능한 의사라고 해도 붙일 수 없다는걸. 손가락 호떡을 보고 나는 더는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기숙사에서 짐을 챙겨 대전터미널로 향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대한민국 어디든 갈 수 있는 대전터미널이다. 하지만 내가 갈 곳은 없었다. 할 수 없이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가 이웃집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로공단에서 성공한 누나였다. 명절 때마다 화려한 원피스와 원색 화장을 하고 내려왔다. 서울에 오면 꼭 연락하라며 신신당부하며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여자가 전화를 받더니 그런 사람 없다면서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걸었다. 다시 끊었다. 다시 걸까 하다가 그만두고, 차선책으로 적어 온 다리 건너 일 년 선배에게 전화했다. 나보다 한 살 많지만, 친구처럼 지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했다. 그럭저럭 돈벌이가 괜찮은지 서울 올라오면 전화하라고 했다.
“학교 때려치우고 지금 대전터미널에 있다고?”
선배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웠다. 내 사정을 들은 선배는 지금 당장 자기가 다니는 공장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선배의 안내대로 전철을 타고 동인천역에 도착하자 작업복을 입은 선배가 반갑게 맞이해 주어 울컥 눈물을 쏟을 뻔했다.
“하필 나라가 시끄러울 때 왔냐?”
“나라가 왜?”
“보면 모르냐.”
그해 1월, 국가가 빼앗아 간 것을 돌려 달라고 항의하던 대학생을 국가가 몰래 죽였다. 그러다가 그해 6월에 또 다른 대학생이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국민이 거리로 나와 국가가 오랫동안 강제로 빼앗았던 주권을 돌려 달라고 외쳤다. 동인천역 넓은 광장을 경무장한 전투경찰이 에워싼 이유였고, 베어와 단추구멍의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간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나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차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선배는 전투경찰이 서 있는 바깥쪽으로 걸어가더니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고도 한참을 더 달린 후에야 버스에서 내렸다. 논 한가운데였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밀려왔다. 선배는 논둑길을 걸어갔다. 둑에서 쉬고 있던 개구리들이 첨벙첨벙 논으로 뛰어들었다. 선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더 어두워졌고, 선배는 어느새 산길로 접어들었다. 고향보다 더 시골이었다. 나는 문득 선배가 겁났다. 혹시 선배의 탈을 쓴 귀신이 아닐까. 귀신이 배가 고파 나를 잡아먹으려고 유인한 건 아닌지. 도망갈까? 뒤를 돌아봤다. 이미 어둠이 모든 걸 삼켜 버렸다.
“아직 멀었어?”
“늦었어. 늦으면 저녁 먹을 수 없어. 빨리 가야 해.”
선배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차가웠다. 어려서 같이 놀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때 산등성이에 봉분들이 보였다. 그곳은 공동묘지였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서울에서 동인천까지 한 시간 넘게 전철을 탔다. 동인천에서 다시 한 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들어왔다. 그리고 공동묘지라니. 별의별 불길한 생각이 다 들었다. 차라리 왕눈이에게 맞을걸, 후배에게 터미널에서 두들겨 맞을걸, 속으로 생각하면서 후회했다. 나는 겁에 질려 선배를 불렀다.
“야~~”
“왠 마. 아이 씨발. 늦으면 식당 아주머니가 밥 안 줘야~~긍께 빨랑 빨랑 따라와.”
원래 선배로 돌아왔다. 표준말을 쓰던 선배가 갑자기 사투리를 쓰자 반가웠다. 그제야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다.
“반갑다.”
“야 이 미친 자식아. 너 오늘 저녁 굶고 싶은 겨?”
공동묘지 정상에 올라가자 드디어 불빛이 보였다. 계곡에 조그마한 공단이 있었다.
공장 식당은 텅 비어있었다. 선배가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어딘가를 노크하자 아주머니가 졸린 눈으로 나왔다.
““고향 친구? 참 잘생겼네. 이제부터 고생이겠네. 애휴. 많이 먹고, 부족하면 저기 밥솥에서 더 퍼 먹어.”
아주머니는 내 등을 어루만지더니 다시 사라졌다. 밥을 먹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명이 눕기에는 좁았다. 하지만 선배의 말대로 둘이 누워도 조금 여유가 있었다. 피곤하여 금방 잠들었다.
나는 다음 날부터 공장에서 일했다. 자동차 부품 생산 공장이었고, 아버지가 하던 공장을 물려받아 해미 출신 선배가 운영하는 공장이라고 했다. 선배가 나를 사장에게 소개하자 사장은 고향 후배라고 하면서 무척 반겼다. 내가 맡은 업무는 피복을 벗긴 전선 끝에 납을 입히는 일이었다.
여직원이 시범을 보여주었는데, 볼펜 심같이 가는 전선 백여 개를 가지런히 잡고 납을 녹인 곳에 살짝 담갔다 빼면 되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5cm가량 피복이 벗겨진 구리 선을 납으로 덮는 일이었다. 숙련되면 기본이 한 번에 50개씩 하는데, 처음이니까 10개를 쥐여 주었다.
나는 전선 10개를 손에 잡고 가지런히 추린 다음 녹은 납 통에 살짝 담갔다 뺐다. 군데군데 누런 구리가 드러났다. 너무 조심하다 보니 납이 중간까지만 덮였기 때문이었다. 다음에는 좀 더 깊숙이 넣었더니 피복 위에 납이 묻어 불량이 났다. 나는 신경을 집중하여 구리선이 납에 다 잠길 때까지 천천히 넣었다가 피복과의 경계점에 도달했을 때 다시 천천히 뺐다. 그런데 이번에는 10개의 전선이 하나로 뭉쳐 버렸다. 너무 천천히 움직이는 바람에 납끼리 엉겨 붙어 납덩어리가 된 거였다. 그렇게 나는 3일 동안 연습했지만, 불량품만 수북하게 쌓아 놓았다.
“한 시간이면 충분한데, 하긴 뭐 사람에 따라 못 하는 일도 있지. 납땜은 너하고 맞지 않나 보다. 조립 분야에서 일해.”
조립 분야는 주로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전선을 색별로 하얀 플라스틱에 꽂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미세한 손놀림도 필요 없이 그냥 기계처럼 단자를 쑤셔 넣으면 되었다.
“무지개만 생각하면 돼. 왼쪽부터 빨주노초파남보 차례로 끼우면 되는 거야. 쉽지?”
선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한 시간 정도 끼우자, 눈보다 더 빠르게 손이 움직였다. 너무나 단순하여 머릿속에는 엉뚱한 생각들이 떠돌았다. 어느덧 일과가 끝났다. 아주머니들은 다섯 박스에서 많게는 일곱 박스씩 끼웠는데, 나는 세 박스에서 조금 모자랐다. 그래도 첫날치고는 많이 했다고 선배가 나를 응원했다.
문제는 다음 날 발생했다. 내가 끼운 세 박스가 그대로 내 옆에 있었던 것이다. 품질관리팀에서 검사해 보니 내가 끼운 부품에서 불량품이 나와서 검열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불량품 하나만 발생해도 그날 분량은 모두 반품되어 다른 직원이 일일이 확인 했던 거였다. 결국 내가 끼운 것 중에 25개의 불량품이 나왔다. 빨간색 자리에 주황색을, 파란색 자리에 초록색을, 남색 자리에 보라색을 끼우는 등 일관성이 없는 불량품이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불량품을 내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나 끼울 때마다 온 신경을 집중했다. 두통이 밀려오더니, 오후가 되자 멀미가 났다. 밥도 먹지 못하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출근하여 보니 박스가 돌아오지 않았다. 품질 관리에서 통과한 거였다. 하지만 두통 때문에 견딜 수 없어, 그날 하루 휴가 냈다. 다음 날 사장은 나를 다른 분야로 옮겨주었다. 그렇게 일곱 개 분야를 한 바퀴 돌자 한 달이 지났다.
“너는 현장하고 궁합이 안 맞는 것 같구나. 사무실에서 회계업무를 해보는 건 어떠냐?”
만약 내가 사장이라면 당장 나를 내쫓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량품 생산에 탁월한 능력이 있는 나를 사장은 어떻게든 붙잡아 두려고 했다. 나는 나를 너무나 잘 알았다. 누렁이 콩이 보다도 머리가 나쁜 나였다. 책상에 앉아서 하는 회계업무는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내가 그만둔다고 하자 사장은 한 달 월급에다가 보너스까지 봉투에 담아 주었다. 모두 15만 원이었다. 4만 원을 가방 깊숙이 집어넣었다. 언젠가 집에 가면 벽장 속에 다시 넣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동인천역으로 나오자마자 나이키 운동화를 샀다. 천 운동화가 아닌 가죽 운동화를 골랐다. 매장에서 가장 비싼 운동화였다. 2만을 꺼내 당당하게 주었다. 나는 가품이 아닌 진품의 하얀 가죽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전철을 탔다.